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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더디게 온다.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우리의 겨울은 왜 이리 길기만 한지.. 찬란한 봄의 제전을 꿈꾸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봄의 제전> / 송찬호

마침내 겨울은 힘을 잃었다

여자는 겨울의 머리에서

왕관이 굴러떨어지는 것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이제 길고 지리한 겨울과의 싸움은 지나갔다

북벽으로 이어진 낭하를 지나

어두운 커튼이 드리워진 차가운 방에

얼음 침대에

겨울은 유폐되었다

여자는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왕관은 숲속에 버려졌다

겨울은 벌써 잊혔다

오직 신생만을 얻기 바랐던

재투성이 여자는

봄이 오는 숲과 들판을 지나

다시 아궁이 앞으로 돌아왔다

이제 이 부엌과 정원에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오직 그것만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마침내 겨울은 힘을 잃었을까....

겨울의 머리에서 왕관이 굴러떨어지고...

겨울의 곁에 있던 여자는 겨울의 몰락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얼음왕국 얼음 침대에 겨울은 유폐되고 왕관은 숲속에 버려지고 겨울은 벌써 잊히고

오직 신생만을 얻고자 했던 재투성이 여자는 봄이 오는 길목에서 종종걸음 치며 다시 아궁이 앞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 오직 분명한 사실은 겨울 가고 봄이 왔다!!" 고 오직 그것만이 분명한 사실이라고 증언한다.

겨울의 힘이 막강할 때, 겨울이 휘두르는 권력에 숨죽이다가

마침내 겨울이 힘을 잃고 왕관이 굴러떨어질 때 비로소 고개를 들고 일어선다. ‘봄’의 이름으로...

다시 부엌과 정원에서 해야할 일들을 생각하며 ....

봄의 제전은 그렇게 시작된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아직 칼바람 부는 겨울이고 겨울의 왕관은 여전히 겨울의 머리 위에 있다.

겨울은 어두운 커튼이 드리워진 방, 얼음 침대에 유폐되지도 않았고 봄 소식은 더디기만 하다.

얼어붙은 심장과 외면하는 시선과 왜소해진 어깨로 칼바람에 등떠밀리듯 종종걸음 치며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불밝힌 도시... 숨죽이며, 흐느끼며 살고 있는 사람들.

어느 순간 표정이 사라진 사람들. 그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는 겨울의 혹독함 속에 봄의 표정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


러시아의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1913년에 발표한 발레곡. < 봄의 제전The Rite of Spring>을 듣는다. 파격과 전위적인 구성으로 발표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던 작품으로 러시아의 원시적인 민속 종교 제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복잡하고 치밀하게 구성된 리듬과 원시주의인 선율이 특징이다.

1부: 대지에 대한 찬양 (Première Partie: L'adoration de la Terre): 초록의 풀과 나무, 꽃으로 뒤덮인 대지에서 환희에 찬 젊은 남녀들이 춤을 추며 행복한 미래를 기원한다.

대지에 대한 찬양. 봄의 태동과 여자들의 춤, 현자들의 행렬

2부에서는 희생제 (Seconde Partie: Le Sacrifice): 젊은 남녀들이 신비로운 모임을 열고 여기서 봄을 맞기 위해 한 처녀를 희생시키는 의식을 시작한다.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를 한 사람 뽑은 다음 그 주위를 돌며 봄의 영광을 찬송하는 춤을 춘다. 제물로 선택된 처녀가 희생의춤을 춘 후 숨을 거두고, 남자들이 그녀의 시체를 들고 나간다.

선택받은 여자에 대한 찬미와 신성한 춤... '봄'이란 단어에는 ‘희생’이 전제되어있는지도 모른다. 봄을 기원하는 이들의 춤, 대지를 위한, 행복한 미래를 위한 .......


< 봄 >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이성부(1942~2012)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더디게 더디게 더디게 그러나 마침내 온다고....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고 말한다.


비슷한 느낌의 시가 있다. 얀카 쿠팔라의 시 <그래도 봄은 온다>


< 그래도 봄은 온다 > - 얀카 쿠팔라(1882-1992)

사방에서 먹구름이 하늘을 채워도 겁내지 마라

어둠이 마법을 걸고 휴경지 위에 까마귀가

원을 그리듯 날아도 그래도 봄은 온다

숲 구석구석 노랑 잎사귀가 떨어져도 겁내지 마라

하루 내내 새 노래가 들리지 않아도

겁쟁이 토끼만이 스쳐도 그래도 봄은 온다

초라한 밭 끝에서 끝까지 텅 비었어도 겁내지 마라

농민의 손은 운이 없어 별 수확 없이

밭매기를 끝냈어도 그래도 봄은 온다

자유로운 힘이 끈으로 묶여 잠들어 있어도

겁내지 마라 그래도 봄은 온다

겁내지 마라 그래도 봄은 온다


겁내지 마라와 그래도 봄은 온다가 반복되는 시다.

산다는 것이 겁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가끔 꾸역꾸역 생을 삼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때가 있다.

단 하루만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나의 쓸모에 회의가 느껴진다.

쓸모라는 말이 주는 도구주의적 느낌에 강력히 반감을 가질때가 있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가 하나의 명징한 삶의 모토처럼 여겨졌던 때도 있었고...

그러나 왜일까... 시간이 흘러갈수록... 손 안에 움켜쥔 인생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질수록... “쓸모있음”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인간의 존엄은 ‘쓸모’로 잴 수 없는 것임에도 말이다.


막바지 겨울이 다시 몸부림을 친다

머리 위의 왕관을 절대 놓지 않으려고.

어디선가 오고있을 봄의 발걸음 소리 들린다.

더디게 더디게 더디게.

힘들게 고독하게 외롭게 처절하게 고통스럽게

절뚝거리며 눈물 흘리며, 피 흘리며 ,울부짖으며...

다시 바람의 결이 달라졌다. 2월의 중반을 넘어섰다.

오늘 나의 하루를 생각한다...... 그리고 다가올 날들을../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산문집 202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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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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