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의 내게 열아홉의 k가 적어준 그 문장들이 그리워서다.
죽음의 순간에 이르면
추억을 되돌리기보다는
잃어버린 물건들을 되찾고 싶다
<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죽음의 순간에 이르면
추억을 되돌리기보다는
잃어버린 물건들을 되찾고 싶다
창가와 문 앞에
우산과 여행 가방, 장갑, 외투가 수두룩
...
이것은 옷핀, 저것은 머리빗,,
종이로 만든 장미와 노끈, 주머니칼이 여기저기
...
열쇠여, 어디에 숨어 있든 간에
때맞춰 모습을 나타내주렴.
...
증명서와 허가증, 설문지와 자격증이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었으면,
...
시계여, 강물에서 얼른 헤엄쳐 나오렴.
너를 손목에 차도 괜찮겠지
...
바람이 빼앗아 달아났던
작은 풍선을 다시 찾을 수 있었으면
...
<빨강 수집가의 시간> p62~63
죽음의 순간에 이르면 추억을 되돌리기보다는 잃어버린 물건들을 되찾고 싶다
잃어버린 물건들 중 되찾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빛바랜 기억 속, 열아홉에서 스물로 넘어가던 시기.
K에게서 받은 책이다. 알퐁스도데의 첫 산문집이었다. 표지를 넘기면 정성 들여 쓴 메모가 있었는데...
모든 만남들이 그러하듯 어떤 형태로든 헤어지고 나면
누군가 남기고 간 사물들이 고통으로 느껴져서 견딜 수 없을 때가 있다.
해가 들어오는 창가. 책꽂이에 붙박이처럼 꽂혀있던 그 책의 행방은... 기억에 없다.
아마도 어린 날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던 그 집을 떠나면서... 정리하지 않았을까. 소중한 선물... 게다가 K의 메모까지 적힌 책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빨강 수집가의 시간> 제1부 빨강의 기억 p58~
이상하게도... 그 책을 다시 되찾고 싶다.
가끔 인터넷 중고 서점에서 그 책의 이름을 검색해보곤 한다. 이미 판권도 소멸해 버렸을 책...
누군가 혹시 중고상품에 올려놓지 않았을까 싶은.. 그러나 중고로 같은 제목의 책을 다시 소유하게 된다 해도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K의 메모가 적힌 책은 아니다.
그러하기에 내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다.
중고책을 살 때 표지 안쪽에 적힌 누군가의 메모를 보면 마음이 시리다.
그런 책을 마주할 때... 오래전 K가 내게 준 책도 그런 운명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다행히 누군가의 책꽂이에 정박해 있다면 축복이지만...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을 확률이 높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우리가 잃어버리고 살아간 것들을 호명한다.
우산과 여행 가방, 장갑, 외투, 옷핀, 머리빗, 종이로 만든 장미와 노끈, 시계... 증명서와 허가증...
바람이 빼앗아 달아나던 그 작은 풍선까지.
열아홉에서 스물로 넘어가던 시기.
내 생의 연결고리 같은 그 작은 책 한 권.... 알퐁스도데의 글이 다시 읽고 싶어서가 아니다.
열아홉의 내게 열아홉의 k가 적어준 그 문장들이 그리워서다.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 그러나 속표지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던 K의 가지런한 글씨는 기억 속에 또렷하다.
지금은 같은 하늘 아래 어딘가에 정박해 닻을 내리고 살고 있겠지. 아니 어쩌면 열아홉의 푸른 날. 내게 주었던 그 책의 존재마저 그리고 나의 존재마저 망각해 버렸을 수도 있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이다.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나의 열아홉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고독하고 우울하고, 섬세하면서 날카로우며, 냉소적이면서 따뜻한... 빛과 어둠의 점이 지대에 있을 테니까.
인간적인 온기가 있었던 지난 시간을 그리워한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주던 열아홉의 시간을 그리워한다.
빛바랜 그 책을, 단정한 필체를, 지난 시간의 우리를...
놓쳐버린 작은 풍선처럼... 아쉬움으로 기억한다./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