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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그것은 안개다

<무진기행> 김승옥.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해석한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짓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앙드레 지드의 지적대로 한 편의 소설 속에는 작가의 몫과 독자의 몫과 신의 몫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자작해설이란 작가가 그 작품을 통해서 하고 싶은 얘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설명할 수 있겠지만 작가 자신도 깨닫지 못한, 아니 도저히 깨달을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독자의 몫과 신의 몫을 제한하고 훼방하기 십상인 것이다.. 한 편의 소설은 그 자체가 독립되고 완전한 개체이다. 한 편의 소설이 완성되는 것은 작가가 원고의 끝에 ‘끝’ 자를 쓰는 순간이 아니라 독자가 읽고 난 이후 독자 나름대로 그 소설이 느껴지고 해석되는 순간이다.

-김승옥 저자의 말


<무진기행>은 1964년 10월 『사상계』에 발표된 김승옥의 대표작으로 주인공 윤희중이 안개로 상징되는 무진으로의 귀향과 탈향을 통해 개인의 꿈과 낭만은 용인되지 않는 사회조직 속에서 현대인의 고독과 비애를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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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진으로 가는 버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광주에서 기차를 내려서 버스로 갈아탄 이래, 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반수면 상태에서 듣고 있었다. 버스 안의 좌석들은 많이 비어있었다. “무진엔 명산물이.... 뭐 별로 없지요?”“별게 없지요. 그러면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건 좀 이상스럽거든요.”... “원 아무리 그렇지만 한 고장에 명산물 하나쯤은 있어야지” 웃음 끝에 한 사람이 말하고 있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는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

6월의 바람이 나를 반수면상태로 끌어넣었기 때문에 나는 힘을 주고 있을 수가 없었다. 바람은 무수히 작은 입자로 되어 있고, 그 입자들은 할 수 있는 한 욕심껏 수면제를 품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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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안색이 아주 나빠져서 큰일 났어요. 어머님 산소에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고 무진에 며칠 동안 계시다가 오세요. 주주총회에서의 일은 아버지 하고 저하고 다 꾸며놓을게요. 당신이 돌아오면 대회생제약회사 전무님이 되어있을 게 아니에요?”

며칠 전 아내의 권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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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이가 좀 든 뒤로 무진에 간 것은 몇 차례 되지 않았지만 그 몇 차례 되지 않은 무진행이 그러나 그때마다 내게는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쳐야 할 때거나 하여튼 무언가 새 출발이 필요할 때였었다. 새 출발이 필요할 때 무진으로 간다는 것은 우연이 결코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진에 가면 새로운 용기라든가, 새로운 계획이 술술 나오기 때문도 아니었었다. 오히려 무진에서의 나는 항상 처박혀 있는 상태였었다....

...

서울의 어느 거리에서고 나의 청각이 문득 외부로 향하면 무자비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소음에 비틀거리거나 밤늦게 신당동 집 앞의 포장된 골목을 자동차로 올라갈 때 나는 물이 가득한 강물이 흐르고 잔디로 덮인 방죽이 시오리 밖의 바닷가까지 뻗어나가...... 그것은 무진이었다. 문득 한 적이 그리울 때도 나는 무진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럴 때의 무진은 내가 관념 속에서 그리고 있는 어느 아늑한 장소일 뿐이지 거기엔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무진에의 연상이 꼬리처럼 항상 따라다녔다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나의 어둡던 세월이 일단 지나가버린 지금은 나는 거의 항상 무진을 잊고 있었던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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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사변으로 대학 강의가 중단되어 서울을 떠나는 마지막 기차를 놓치고 서울에서 무진까지 천여 리 길을 발가락이 불어 터지도록 걸어서 내려왔고 어머니에 의해 골방에 처박혔고 의용군 징발도 국군 징병도 모두 기피해버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골방보다 전선을 택하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쓴 일기장들은 그 후 모두 태워버렸지만

‘어머니 혹시 제가 지금 미친다면 대강 다음과 같은 원인들일 테니 그 점에 유의하셔서 저를 치료해 보십시오..’ 그런 내용. 스스로를 모멸하고 오욕을 견디는 내용들이었다.


# 밤에 만난 사람들


'박'이라고 하는 무진중학교 후배와 함께 세무서장이 된 '조'의 집을 향하여 갔다

거리는 어두컴컴했다. 다리를 건널 때 나는 냇가의 나무들이 어슴푸레하게 물속에 비쳐있는 것을 보았다. 옛날 언젠가 역시 이 다리를 밤중에 건너면서 나는 저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는 나무들을 저주했었다. 금방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 듯함 모습으로 나무들은 서 있었던 것이다.

조의 응접실에서 세무서 직원 3명과 하인숙이라는 음악선생을 만났다.

그 여자는 개성 있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윤곽은 갸름했고 눈이 컸고 얼굴색은 노리끼리했다. 전체적으로 병약한 인상이었으나 좀 높은 콧날과 두터운 입술이 병약하다는 인상을 버리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 여선생음 <목포의 눈물>을 부르고 있었다... 그 여자가 부르는 <목포의 눈물>에는 작부들이 부르는 그것에서 들을 수 있는 것과 같은 꺾임이 없었고. 목소리의 갈라짐이 없었고 흔히 유행가 특유의 청승맞음이 없었다... 머리를 풀어헤친 광녀의 냉소가 스며 있었고 무엇보다도 시체 썩어가는 듯한 무진의 냄새가 스며 있었다.

여자의 노래가 끝나자 나는 의식적으로 바보 같은 웃음을 띠고 박수를 쳤고... 박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은 가고 나는 다시 ‘속물’ 들 틈에 끼었다. 무진에서는 누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은 모두 속물들이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이 하는 모든 행위는 무위와 똑같은 무게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장난이라고


직원들도 흩어져가고 결국 나와 여자만 남았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언젠가 여름밤, 멀고 가까운 논에서 들려오는 개구리울음소리들이 나의 감각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수없이 많은 별로 바뀌어져 가는 것을 느끼곤 했었다... 왜 그렇게 못 견디어했을까. 별리 무수히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고 있던 옛날 나는 왜 그렇게 분해서 못 견디어했을까.


여자는 명랑한 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오빠라고 부를 테니까 절 서울로 데려가 주시겠어요?”

“서울에 가고 싶으신가요?”

“네”

“무진이 싫은가요?”

“미칠 것 같아요. 금방 미칠 것 같아요. 서울엔 동창들도 많고.. ”

...

“ 내 경험으로는 서울에서의 생활이 반드시 좋지도 않더군요. 책임, 책임뿐입니다.”

“그렇지만 여긴 무책임도 책임도 없는걸요. 하여튼 서울에 가고 싶어요. 절 데려가주시겠어요?”


... 내가 이불속으로 들어갔을 때 통금 사이렌이 불었다. 갑작스럽고 요란한 소리였다. 모든 사물이, 모든 사고가 그 사이렌에 흡수되었다. 마침내 이 세상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이렌만이 세상에 남아있었다.


# 바다로 뻗은 긴 방죽


어머니 산소로 가서 바지를 무릎 위까지 걷어올리고 비를 맞으며 묘를 향하여 엎드려 절했다. 비가 나를 굉장한 효자로 만들어주었다. 풀을 뜯으면서 나는 전무님으로 만들기 위해 전무 선출에 관계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호걸웃음을 지을 장인영감을 상상했다. 그러자 나는 묘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잔디가 곱게 깔린 방죽길을 걸어갈 때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시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붉은색의 얇은 스웨터를 입고 하얀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싼 하얀 손수건이 그 여자의 축 늘어진 손에서 좀 떨어진 곳에 굴러있었다... 나는 문득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고 있었던 게 이 여자의 임종을 지켜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통금해제 사이렌이 불 고 이 여자는 약을 먹고 그제야 하는 슬며시 잠이 들었던 것만 같다. 갑자기 이 여자가 나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세무서장 조. 그는 무진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아니 나는 고쳐 생각하기로 했다. 어떤 사람을 잘 안다는 것 – 잘 아는 체한다는 것이 그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 불행한 일이다. 우리가 비난할 수 있고 적어도 평가하려고 드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에 한하는 것이 기 때문이다.


"하선생이란 여자가 네 색싯감이냐?"

“내 색시감이 그 정도로 밖에 안 보이냐?”

“그 정도가 어때서?”

“야 이 약아빠진 놈아 넌 빽 좋고 돈 많은 과부를 물어놓고 기껏 나는 어디서 굴러온 줄 모르는 말라빠진 음악선생이나 차지하라고?”

“그 여자 똑똑하기는 한데 그 여자가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고향에서 그 여자를 데리러 올 사람 하나 변변하게 없거든.”


시간이 되어 그 여자랑 만나기로 한 읍내에서 점 떨어진 바다로 뻗어나가고 있는 방죽으로 갔다. 노란 파라솔이 멀리 보였다. 그것이 그 여자였다.

“저 오늘 박 선생님께 선생님에 관해서 여러 가지 물어봤어요.”

“그래요”

“선생님의 혈액형을 물어봤어요?”

“내 혈액형을요?”

“전 혈액형에 대해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사람들이 꼭 자신의 혈액형이 나타내주는 꼭 그 성격대로 이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그럼 세상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성격밖에 없을 게 아니에요?”

“그게 어디 믿음입니까? 희망이지.”

“전 제가 바라는 것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성격이에요.”

“그건 무슨 혈액형입니까?”

“ 바보라는 이름의 혈액형이에요.”

우리는 후텁지근한 공기 속에서 괴롭게 웃었다.


어느 해 나는 그 집에서 방 한 칸을 얻어들고 더러워진 나의 폐를 씻어내고 있었다. 이 바닷가에서 보낸 일 년. 그때 내가 쓴 편지들 속에서 사람들은 ‘쓸쓸하다’라는 단어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단어는 다소 천박하고 이제는 사람들의 가슴에 호소해 오는 능력도 거의 상실해 버린 사어 같은 것이지만 그 무렵의 내게는 그 말밖에 써야 할 말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었다.

우리가 찾는 집에 도착했다. 세월이 그 집과 그 집 사람들만은 피해서 지나갔던 모양이다. 나는 옛날의 내가 되었고 집주인 부부는 내가 들어있던 방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나는 그 방에서 여자의 조바심을, 마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으로부터. 누구지가 자신이 손에서 칼을 빼앗아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주었다.

...

백사장을 걸었다.

“자기 자신이 싫어지는 것을 경험하신 적이 있으세요?”

여자가 꾸민 명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

“선생님 저 서울에 가고 싶지 않아요.”

“거짓말은 하지 말기로 해.”

“거짓말 아니에요.”

“전 선생님께서 여기 계시는 일주일 동안만 멋있는 연애를 할 계획이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헤어지면서 여자가 말했다.

“그렇지만 내 힘이 더 세니까 별 수 없이 끌려서 서울까지 가게 될걸.”


#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모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늦은 아침이었다.

“27일 회의참석필요. 급상경바람 영"

27일은 모레였다. 아내의 전보가 무진에 와서 내가 한 모든 행동과 사고를 내게 점점 명료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마음속에서 잊힐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전보와 나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 만이다. 한 번만 그리고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


그러나 나는 돌아서서 전보의 눈을 피하여 편지를 썼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이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이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이 당신을 햇볕 속으로 끌어다 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소식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쓰고 나서 나는 그 편지를 읽어봤다. 또 한 번 읽어봤다. 그리고 찢어버렸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생각하는 대로 바로 믿어버리는 '바보라는 혈액형'을 지닌 음악선생 하인숙.

무진에 가 있으면 전무이사 문제가 잘 해결되어 있을 테니...라는 아내와 장인영감의 권유로 윤희중은 무진을 향한다. 윤희중이 무진을 향할 때는 대개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쳐야 할 때거나, 무언가 새 출발이 필요할 때였다. 새 출발이 필요할 때 무진으로 갔지만 새로운 용기를 얻거나, 새로운 계획을 짜내지도 못했다.

오히려 무진에 처박혀 있는 상태였다.

소심한 후배 '박'선생과 속물근성을 지닌 세무소장 조.

정결한 것도 아니고 드러낸 요부도 아닌, 청순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천박하지도 않은 여자 하인숙

트로트 <목포의 눈물>을 무진스럽게 부르는 여자.

여자는 서울에서 온 윤희중에게 호감을 보인다. 데려가 달라고 미칠 것 같다고... 책임도 무책임도 없는 무진이 견딜 수 없다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 만이다. 한 번만 그리고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하면서도 하인숙에게 편지를 쓴다.

유폐되다시피 살던 지난날의 자신을 하인숙에게서 발견한 윤희중은 그녀를 사랑한다고 편지에 적는다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대로 연락하겠다고... 그러나 편지를 찢어버린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 선명한 검은 글씨로 ’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팻말을 보면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윤희중은 서울에서 잘 나가는 제약회사 전무이사로 승진할 것이고....

무진을 과거의 무진보다 더 아프게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결정된 안락한 가정과 지위를 포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어쩌면 그는 다시 무진에 오지 못할 수도 있다. 자의든 타의든 도망치듯 달아난 자신을 무진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기에....


하인숙... 그녀를 짝사랑하는 같은 학교 박 선생은 눈에 들지 않고 그렇다고 속물 세무소장 조에게는 놀잇감일 뿐 결혼상대가 아님을 잘 알면서도 그녀는 무진을 떠나지 못했다. 무진을 삥 둘러싼 안개가 그녀가 외지로 나가는 것을 차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무진을 삥 둘러싸있는 안개.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는 입김과 같은 안개를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안개처럼.... 뿌옇게 다가와서 일시에 사라져 버린 희중을 생각하는 것도 덧없다.

하인숙은 어쩌면 윤희중이 우연히 방죽을 걷다가 보게 된 술집여자 시신처럼..

자살을 택하지 않을까... 살아있으되 조금씩 죽어가는 것 같은 삶을 견딜 수 없다면 말이다.


’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팻말을 보면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우리가 어떤 공간으로부터, 혹은 누군가로부터 떠나는 일... 어떤 설명이나 감정의 정리 없이 떠나는 일은 때로 심한 부끄러움으로 남는다.

1964년 작품인 <무진기행>이 2025년 지금 읽어도 낯설지 않고 읽을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듯한 것은 그만큼 김승옥작가의 문학성이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반증이다


김승옥은 " 한 편의 소설이 완성되는 것은 작가가 원고의 끝에 ‘끝’ 자를 쓰는 순간이 아니라 독자가 읽고 난 이후 독자 나름대로 그 소설이 느껴지고 해석되는 순간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안개 가득한 아침이면 나는 무진으로 고독하고 지친 몸을 끌고 떠난다.

앞은 자세히 보이지 않더라도...

그 안개의 뒤, 어딘가에는 여전히 살아가야 하는 희망. 의미가 숨어있을 테니까.

벌써 3 월 둘째 주다.

살아가야 한다. 열심히...../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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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학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 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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