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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느끼지 못한 시간은 모두 없어져버리지.

길은 내 안에 있어. 느리게 갈수록 빠른 거야 / 미하엘엔데 『모모』

시간은 삶이며, 삶은 우리 마음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니까.


세상에는 아주 중요하지만 너무나 일상적인 비밀이 있다.

모든 사람이 이 비밀에 관여하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대개 이 비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비밀은 바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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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엔데의 작품 『모모』는 시간과 삶,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담겨있다. 누구에게든 언제나 늘 당연하게 주어져 있는 ‘시간’이라는 잊기 쉬운 소중한 가치를 일깨우며, 점점 더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자기 시간의 주인으로 살아가라는 격려를 담고 있다.


P14

아닌 게 아니라 모모의 모습은 약간 이상했다.

칠흑같이 까만 고수머리였는데 마구 뒤엉켜있었다. 깜짝 놀랄 만큼 예쁜 커다란 눈은 머리 색 깔과 똑같이 까만색이었다. 거의 언제나 맨발로 돌아다녀서 발 역시 새까맸다. 모모는 겨울에만 가끔 신발을 신었는데 신발은 언제나 짝짝 인 데다 너무 헐렁했다. 알록달록한 천을 이어 붙여 만든 치마는 복사뼈까지 치렁치렁 내려왔다. 그 위에 낡아빠진 헐렁한 남자 웃옷을 걸치고 있었다.


이름이 뭐니?

모모에요

누가 지어주셨니?

저요

그럼 생일이 언제니?

제가 기억하기론 저는 언제나 있었던 것 같아요.

대체 몇 살이니?

백 살요. 아니 백 두 살요

넌 어린애잖니? 널 돌봐주는 사람이 있니?

제가 돌보죠


“아무튼 모모에게 가보세”

이 말은 인근 마을 사람들의 일상어가 되어버렸다.

모모의 재주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재주였다. 또한 모모가 얼마든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재산, 그것은 바로 시간이었다.


도로 청소부 베포아저씨를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누가 무엇을 물어보면 빙그레 웃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하는데 두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하루 종일 걸리기도 했는데 오직 모모만이 그의 답을 기다릴 줄 알았다.

베포는 진실이 아닌 이야기를 하지 않기 위해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베포는 모든 불행은 의도적인 혹은 의도하지 않은 수많은 거짓말, 그러니까 단지 급하게 서두르거나 철저하기 못해서 저지르게 되는 수많은 거짓말에서 생겨난다고 믿고 있었다.


세상에는 아주 중요하지만 너무나 일상적인 비밀이 있다.

모든 사람이 이 비밀에 관여하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대개 이 비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비밀은 바로 시간이다.

한 시간 동안 우리가 무슨 일을 겪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회색신사들은 이 진리를 알고 있었다. 회색신사들은 자기들의 목적 달성에 필요한 사람의 신상을 속속들이 파악해놓고 있었다.

첫 대상은 작은 이발소 주인 푸지 씨였다.

“내 인생은 실패작이야. 고작 보잘것없는 이발사일 뿐. 제대로 된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 텐데.”

바로 이때 회색신사가 등장한다.

“시간 저축 은행에서 나왔습니다. 푸지 씨. 당신은 인생을 철컥거리는 가위질 소리와 쓸데없는 잡담과 비누 거품으로 허비하고 있어요.”

영업사원 XYQ384b는 “ 선생님 일을 더 빨리 하시고. 불필요한 부분은 모두 생략하세요. 손님 한 명당 30분이 걸렸다면 이제 15분으로 줄이고, 어머니를 방문하는 시간을 줄이려면 값이 싼 양로원으로 보내세요. 노래하고 책 읽고 친구 만나는 일은 모두 시간 낭비예요.”

대도시에는 점점 푸지 씨와 같은 사람들이 늘어났다.


시간 절약, 나날이 윤택해지는 삶

시간을 아끼면 미래가 보인다

더욱 보람찬 인생을 사는 법

시간은 돈이다.


이제 그들은 ‘아무튼 모모에게 가 봐 “같은 말을 잊어버렸다.

그들이 시간을 아낄수록 가진 것이 점점 더 줄어들었다.


원형극장에 놀러 오던 아이들도 변해갔다

”우리 엄마, 아빠가 그러는데 모모 너, 기기 아저씨, 베포할아버지는 모두 건달에다 게으름뱅 이래. 하느님의 소중한 시간을 훔친다는 거야. 그래서 나보고 이제 여기 가는 걸 그만 두래. “


모모는 옛 친구들도, 아이들도 찾아오지 않자 그들을 찾아 나섰다. 많은 친구들이 다시 모모에게 돌아오자 회색신사들이 영업에 방해가 되었다.

그들은 모모에게 진짜 마네킹 같은 인형을 선물하는데 모모는 그 인형이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지루해졌다

”보다시피 아주 간단하지, 지루해지면 점점 더 많은 걸 장만하기만 하면 되지. 비비걸이 지루해지면 우리가 그에 꼭 어울리는 남자친구 부비를 선물해 줄게. “


모모는 거북 카시오페아의 뒤를 따라 호라박사에게 가는 중이다. 모모와 거북은 수많은 사람들이 뒤엉킨 거리에서도 부딪히지 않았고 자동차를 잘 피해 가고 있었다.

한 번도 서두르지 않았고 천천히 걸으면서도 그렇게 빨리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언제나 없는 거리

언제나 없는 거리에 들어서자 마치 세찬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도저히 못 가겠어 “

”뒷걸음쳐 봐! “

몸을 돌려 뒷걸음치니 전혀 힘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한마디로 모모의 삶이 뒷걸음쳤다.


아무 데도 없는 집

작은 문위에는 ”세쿤두스 미누티우스 호라박사’라고 적혀있었다

호라박사는

“이건 운명의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란다. 드물게 찾아오는 운명의 시간을 정확하게 알려주지. 그 순간이 오면 저 하늘 가장 먼 곳에 있는 별까지 이 세상 모든 사물과 존재들이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쳐서 이제껏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날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애석하게도 인간들은 그 순간을 이용할 줄 몰라, 그래서 운명의 시간은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지나가 버릴 때가 많아. 그 시간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아주 위대한 일이 세상에 벌어지지.”

카시오페이아가 어디에서 회색신사들을 만날 거라는 것을 미리 알면 바로 딴 길로 가면 되겠네요? “

”카시오페이아는 어떤 사실을 미리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조금도 변경시킬 수는 없어, 카시오페이아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리라는 것만을 알고 있단다. “


”회색신사들의 얼굴이 왜 잿빛인가요? “

” 죽은 것으로 목숨을 이어가기 때문이지. 그들은 인간의 일생을 먹고 살아간단다. 하지만 진짜 주인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시간은 말 그대로 죽은 시간이 되는 거야.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시간을 갖고 있거든. 시간은 진짜 주인의 시간일 때만 살아있지. “


”회색 신사들은 사람이 아닌가요? “

”아니란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야. “

”그럼 어디서 온 거예요? “
”그들은 사람들이 생겨날 기회를 주면 생겨난단다. 기회만 주면.. 게다가 사람들은 이제 그들에게 자기들을 좌지우지할 기회까지 주고 있어. “

”만약 그들이 시간을 훔칠 수 없다면요? “

”그들이 태어난 무(無)로 돌아가는 거지. “


p249

나는 그저 시간 관리자일 뿐이야. 내가 맡은 일은 저마다에게 지정되어 있는 시간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거지.”

“그럼 시간 도둑들이 사람들한테서 더 이상 시간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조정하실 수는 없는가요?”

“그럴 순 없어. 자신의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스스로 결정할 문제니까. 또 자기 시간을 지키는 것도 사람들 몫이지. 나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나누어 줄 뿐이다. 가슴으로 느끼지 않은 시간은 모두 없어져 버리지”


모모는 이렇게 찬란하게 아름다운 꽃을 본 적 없었다.

별의 추가 천천히 연못 가장자리에 접근하자 어두운 물속에서 커다란 꽃봉오리가 떠올라 활짝 피어났다... 어느 순간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하더니 아름다운 꽃도 시들기 시작하고 꽃잎도 한 장한 장 떨어지더니 어두운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무엇이 영원히 자신을 떠나버린 것 같았다.

추가 검은 연못의 한가운데에 이르자 그 꽃은 완전히 스러져 버림과 동시에 맞은편에서 다시 꽃봉오리 하나가 자태를 드러냈다.... 모모든 갓 피어난 꽃이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는 ㄷ것을 깨달았다. 모모는 웅장한 울림이 끊임없이 다르게 배열되고 변하면서 계속 새로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것. 음악이었지만 동시에 음악이 아닌 전혀 다른 것이기도 했다.


“모모 네가 보고 들었던 것은 모든 사람의 시간이 아니야. 너 자신의 시간이었을 뿐이지.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네가 막 다녀온 장소와 같은 곳이 있단다. 하지만 그곳은 내가 데리고 가는 사람만이 갈 수 있어”



회색신사들의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사태가 무척 심각합니다. 모모라는 여자애를 추적하는데 동원할 영업사원들은 거의 투입했는데 시간이 무려 6시간 13분 8초가 걸렸습니다. 추적에 참가하느라 시간을 벌어들이는 일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어서. 무려 37억 3825만 9114초를 낭비했어요.”

“모든 정황으로 볼 때 호라박사가 그 아이를 돕고 있는 게 분명해요.

“좋은 방법이 있어요. 도로 청소부 베포와 관광 안내원 기기. 아이들을 모모로부터 격리해 못 만나게 하는 거죠. 모모든 그 친구들을 다시 찾기 위해 우리에게 호라박사의 집을 안내해 줄 겁니다.”


모모가 사라진 뒤 기기는 회색신사들의 유혹에 넘어가 청중의 어릿광대이자 꼭두각시가 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점점 어리석거나 아니면 아주 감상적으로 되었는데.. 그는 그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

몽상가 기기는 사기꾼 기롤라모도 변해갔다.


회색신사들이 도로 청소부 베포를 손아귀에 넣는 일은 기기보다 훨씬 어려웠다.

“우리의 존재와 활동에 대해 다시는 한 마디도 안 하겠다고 약속하면 모모를 돌려주겠소. 몸값으로 10만 시간을 저축하는 것을 요구하는 바요.”
베포는 모모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에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르고 10만 시간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쓸고 또 쓸었다.

모모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모두 탁아소를 세워 집어넣어 버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들의 얼굴은 시간을 아끼는 꼬마어른처럼 되어갔다. 짜증스럽게, 지루해하며, 적의를 품은 채.


호라박사의 집에서 보낸 시간이 도시에서는 1년이 지난 뒤였다. 모모는 기기를 찾아 나섰다.

어른 키를 넘는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유명한 이야기꾼 기롤라모의 집

기기는 말끔하게 단장을 했고 좋은 냄새가 났지만 예전과는 달라 보였다.

모모,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입 다물고 묵묵히 사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 이름 없는 가난뱅이가 될 테니까. 꿈도 없이 가난하다는 것은 지옥 같은 일이지.”

모모는 기기를 찾았지만 정말 기기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모모는 며칠에 한 번씩 기기의 집 대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지만 대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모모는 길에서 예전에 원형극장에 찾아오던 아이들을 만났지만

아이들은 변해 있었다. 회색 제복을 입고 이상하게 굳어있는 얼굴엔 생기가 없었다.

“우린 이젠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면 안 돼.”

트럼프 카드처럼 납작해진 아이들은 뒤죽박죽 섞이고 다시 정리되고 다시 섞였다.

모모는 베포와 기기, 아이들을 돕고 싶었다.


회색신사들은 “우리는 약속을 지킬 거니까 호라박사에게 안내해.”

“길을 찾을 수 없어요. 길을 아는 건 카시오페이아뿐이지요”

“그 거북은 지금 어디 있지?”

“ 거북은 나랑 같이 돌아왔어요... 하지만... 난.,.. 거북을 잃어버렸어요.”
“ 즉시 비상경보를 울리시오. 거북을 찾아야 해요!”


모모는 회색신사들이 정말 카시오페이아를 찾을까 두려웠다.

그런데 바로 발아래 거북이가 돌아와 있었다.

“나 다시 돌아왔어”

“우리 다시 호라박사에게 가는 거야.”

좋아. 그런데 좀 빨리 가게 내가 널 안고 가면 안될까?”

“미안하지만 안 돼!

“왜 꼭 네가 직접 기어가야만 하니?”

“길은 내 안에 있어.”
이 말과 함께 거북은 움직이기 시작했고 모모는 거북을 따라 천천히 한 발짝씩 뒤따랐다.


둘의 대화를 엿들은 회색 신사들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모모는 거북이가 저렇게 지독하게 느릿느릿 기어가는 것이 불안했다

“부탁이야 좀 더 빨리 걸으면 안 될까?”

“느리게 갈수록 더 빠른 거야.

거북은 아까보다 더 느릿느릿 기어갔다. 전에도 그랬듯 모모는 느리게 감으로써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알았다.


길은 꿈의 거리를 지나 하얀 구역 내부 깊숙이 이어졌다

“언제나 없는 거리”로 접어드는 모퉁이에 이르렀다

카시오페이아는 이미 그 거리로 들어서서 “아무 데도 없는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몸을 돌려 뒷걸음질 쳐야만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시간 도둑들이 움직이는 회색 담장인 양 걸어오고 있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길을 꽉 메우고... 그런데 언제나 없는 거리에 들어서자 그들은 무(無)로 해체되어 버렸다. 앞으로 뻗친 구 팔이 사라졌고, 두 다리와 몸뚱이가, 경악과 공포에 질린 얼굴이 사라졌다.

그들은 성난 얼굴과 위협적으로 주먹을 흔들었지만 모모를 따라올 수 없었다.


“왜 그들은 우리 있는 곳까지 들어올 수 없죠?”
“시간의 소용돌이 때문이지. 그 거리에서는 모든 것을 거꾸로 해야 한다는 것. 아무 데도 없는 집 주변에선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 다른 데서는 시간이 네 안으로 들어오지. 그래서 네 안에 점점 많은 시간이 쌓이면서 나이를 먹게 되는 거야. 하지만 ‘언제나 없는 거리”에서는 시간이 네게서 빠져나간단다. 그 거리를 지날 때 걸린 시간만큼만 어려지지. “

”회색신사들은 훔친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시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면 몸에서 금세 시간이 빠져나가는 거야. 그래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단다 “


p374

”시간의 꽃을 기억하고 있지?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을 갖고 있기에 그럼 황금빛 시간의 사원을 하나씩 갖고 있다고 말이야. 사람들이 그 사원에 회색신사들을 들이게 되면 회색인 들은 시간의 꽃을 빼앗을 수 있지. 하지만 사람의 가슴에서 뽑힌 시간의 꽃은 죽을 수 없어. 진짜 주인에게서 떼어내 졌기 때문에 살아 있다고 할 수도 없지. 시간의 꽃은 전심전력으로 진짜 주인에게 돌아가려고 한단다. 회색신사들은 훔친 시간의 꽃을 냉기로 얼려서 땅 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을 거야. “

"저장 창고에서 시간을 배급받고 꽃잎을 말려 시가를 만들어 피우지. 연기로 변하면 시간은 완전히 죽게 되거든. 회색 신사들은 이처럼 사람의 죽은 시간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단다.”

P376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의욕이 사라지고 어떤 흥미도 느낄 수 없지. 몹시 지루해지는 거야, 하루하루 한 주일이 지날수록 악화되어서 사람들은 기분이 언짢아지고 가슴속이 텅 빈 것 같고 스스로와 이 세상에 대해 불만을 느끼게 된단다. 그리고는 그런 감정마저 느끼지 못하게 되지

세상이 낯설어지고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화도 내지도 않고 열광하지도 않아. 사랑도 하지 못하고.. 그 지경에 이르면 병은 고칠 수 없어. 회색신사와 똑같아진단다."


최후의 시간도둑이 사라지면서 냉기도 사라져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큰 창고엔 유리컵 같은 수많은 시간의 꽃들이 끝이 안 보이는 기다란 선반에 세워져 있었다. 어떤 꽃은 다른 꽃들보다 더 찬란했다. 하지만 똑같은 꽃은 하나도 없었다. 살아있는 생명의 꽃이 수십만 수백만 송이나 되었다.

모모가 들고 있던 시간의 꽃에서 마지막 꽃잎이 떨어지면서 폭풍이 일었다. 풀려난 사건들 아이 일으킨 바람이었다. 꽃들이 눈송이처럼 얼어붙은 세상 위로 떨어졌다. 원래 있었던 곳인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돌아간 것이다. 시간이 다시 흐르고 모든 것이 활기를 띠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도시에서는 오랫동안 볼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다.

아이들이 길 한복판에 나와 놀고 아이들이 비키길 기다릴 수밖에 없는 운전자들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은 서로 안부를 물었고 새에게 모이를 주고 꽃의 향기를 맡았다.

의사들은 환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정성껏 돌볼 시간이 있었다. 노동자들은 일에 대한 애정을 갖고 편안하게 일할 수 있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가능한 짧은 시간에 무슨 일을 하든 자기가 필요한 만큼,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시간이 다시 풍부해진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어떻게 세상에 왔는지 모르듯 언제 이 세상에서 사라질지 알 수 없다.

사람들 안에 살아있는 시간, 가슴으로 느끼는 시간을 노리는 이들이 있다. 잿빛 얼굴의 회색신사들.

그들은 언제나 우리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그들이 존재를 드러내 보일 때는 우리가 삶에 대해, 시간에 대해, 자신의 능력에 대해 불평불만을 가질 때다.

가끔 그리고 자주 우리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자꾸 뒤처지는 느낌이 들 때, 소외감이 밀려오고 패배자가 된 것 같은 마음, 상실감으로 마음이 가득 찰 때.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혼돈스러울 때....

우리의 시간을, 삶을 노리는 회색신사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무슨 일을 얼마나 잘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만큼 해내는 것.

빠르게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 때로는 느리게 가는 것이 빠를 수 있음을..

아무리 바빠도 다른 누군가의 길을 대신 들고 달려갈 수는 없다.

거북이 카시오페이아는 "길은 내 안에 있어"라고 당당히 말하지 않는가.


아주 오래전 읽었던 <모모>를 다시 집어든 것은 "길은 내 안에 있어"라는 말을 찾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자기만의 속도로 자기만의 인생을 걸어가야 한다.

벌써 3월도 중반을 향하고 있다. 소중한 일들,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것들을 기억하는 시간...

그래 "길은 내 안에 있어"라고 중얼거리며

그리고 때론 뒷걸음칠 수도 있다는 것을..........

그것이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다는 사실을/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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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 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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