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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닌 것

나는 나로 살고 싶다. 그리하여 나로 죽어가고 싶다.

<아닌 것 >


당신의 나이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이 입는 옷의 크기도

몸무게와

머리 색깔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의 이름도

두 뺨의 보조개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 읽은 모든 책이고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이다.


당신은 아침의 잠긴 목소리이고

당신이 미처 감추지 못한 미소이다.‘

당신은 당신의 웃음 속 사랑스러움이고

당신이 흘린 모든 눈물이다,


당신이 철저히 혼자라는 걸 알 때

당신이 목청껏 부르는 노래

당신이 여행한 장소들

당신이 안식처라고 부르는 곳이 당신이다.


당신은 당신이 믿는 것들이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당신 방에 걸린 사진들이고

당신이 꿈꾸는 미래이다.


당신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당신이 잊은 것 같다.

당신 아닌 그 모든 것들로

자신을 정의하기로 결정하는 순간에는

-에린 핸슨


외국 영화를 보다가 장례식 장면이 나오면 주의 깊게 보게 되는데 유족대표 (대개는 남편 혹은 아내이거나 자녀들)가 연단 앞으로 나와서 고인에 대한 추도사를 하는 장면 때문이다.

“어머니~~~ 님은...... 한 분이셨으며...... ”

누군가의 일생을 압축하여 장례식장에 모인 분들에게 소개하는 것...

그 추도사를 듣다 보면 고인을 알지 못하면서도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고군분투한 한 사람이 비로소 영원한 동면에 접어든 것에 대한 연민이 일어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장례미사나 다른 장례의식에 있어서 유족이 나와서 고인의 추도사를 하는 것을 별로 보지 못했다. 정말 중요한 일임에도 그것은 개인적인 슬픔의 일부로 치부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신부님이나 목사님.. 그 외 다른 분들의 목소리는 있어도 정작 그녀 혹은 그와 더불어 살아온 이들의 목소리는 배제된다. 그 목소리는 흐느낌으로 대체될 뿐이다.


아버지의 죽음, 대학 졸업반 때라 아무 생각도 경황도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도 너무도 갑작스러웠기에 고인에 대한 추모, 추도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다.

시어머니의 죽음... 췌장암선고를 받으신 지 4개월여.. 호스피스병동을 드나들면서도 시어머니에 대한 추도사를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시댁 식구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내게 가장 소중한 세 분의 추도사를 시도해보지도 못하였다.

누군가의 일생을 정리하여 소개하고 정화된 언어로 슬픔을 승화시키는 일은 중요한 의례일 텐데 말이다.


그러하다면 누군가가 고인이 된 나를 위하여 추도사를 쓴다고 가정할 때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에린 핸슨의 시 <아닌 것>에 의하면 생김새나 나이, 직업, 가족구성원으로 나를 설명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그것은 일종의 ’ 내가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시에서 이야기한 대로 오롯이 ’나‘인 것을 생각하면

내가 읽은 모든 책과 내가 하는 모든 말과 내가 흘린 눈물, 아침의 잠긴 목소리....

내가 철저히 혼자라는 걸 알 때 목청껏 부르는 노래...

내가 여행한 곳. 내가 안식처라고 부르는 것

내가 믿는 것들, 내 방에 걸린 사진, 내가 꿈꾸는 미래다.

그리고 내가 나 아닌 모든 것들로 나를 정의하기로 결정하는 순간에 나는 나를 잊은 것이라 한다.


나는 나로 살고 싶다. 그리하여 나로 죽어가고 싶다.

나를 오독하지 않고 제대로 설명해 줄 누군가가 있을까.

젊은 날 부모의 죽음이 가져다준 엄청난 충격 앞에 감히 몇 마디 말로 '추모'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듯 누군가도 그러할 지도 모르겠다.

에린 핸슨의 시를 읽다가 아름답고 진솔한 추도사를 들어보지도 못하고 레테의 강을 건넌 이들을 생각한다.

인생이란 희로애락의 반복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요즘이다. 어떻게 세상에 온 줄을 알 수 없듯 세상을 언제 어떻게 떠나게 될지 알 수 없다. 누구나 예외가 아니다.

고인이 될 나를 위해 뒤에 남은 이가 멋진 추도사를 쓸 수 있도록 부끄럽지 않게 하루하루에 충실하는 것 외엔...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

생각과 말과 행위, 웃음과 눈물, 불안과 확신. 슬픔과 기쁨 사이에서

진짜 나를 찾아보려 한다. /려원


<빨강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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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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