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하여... 매몰되기 위하여... 그런데도 우리는 길을 열망하는 족속들.
길 없는 길
손종호
길을 믿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모든 길들은 지워지기 위하여,
문 앞에서 매몰되기 위하여 우릴 부르느니라. 나는 결국 흉하게 일그러진 나를 만나, 함께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찾아 헤매었을 뿐, 새들의 길에는 표적이 없다. (후략)
<어머니의 잠언> 부분
손종호 시 속의 어머니는 ‘길을 믿어서는 안 된다’라고 이야기한다.
세상의 모든 길들은 지워지기 위하여, 문 앞에서 매몰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는 것이라고...
길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
새들의 길에는 표적도 없다.
새들이 지나간 길에는 흔적하나 남아있지 않다.
루쉰는 『고향』에서 희망은 길과 같은 것이라 했다. 길이라 본디 없는 것인데 여럿이 함께 걸으면 길이 되는 것이라고.....
길을 믿지 말라는 어미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구나 길을 동경한다.
길의 끝... 길의 끝에 가보고 싶은 열망을 누구든 한 번은 가졌을 테니까..
길이 시끄러운 요즘이다.
길 위의 사람들......... 길을 만드는 이들인가, 길을 더럽히는 사람들인가.
생각해 보면 길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날들이다.
모든 것들은 생성되기 위해서도 존재하지만 지워지기 위해서, 사라지기 위해서도 존재하는 것일 테니까.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있다.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시작 메모/1988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지만 그 고통을 사랑한 남자
어떤 믿음이 언젠가 자신을 부른다면 기꺼이 따라갈 준비가 되어있다는 남자를 생각한다.
고통을 사랑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언젠가 올지도, 오지 않을지도 모를 어떤 믿음을 기다리는 남자... 기꺼이 준비를 하는
그는 세상에 없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 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이 몰려오는 아직 추운 4월...
오래전 기형도의 말처럼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자판 위에 길을 내고 있다.
세상의 믿지 못할 길을 탐하지 않기 위하여.
지워지고 매몰되어 버릴 그 길을 열망하지 않기 위하여....
대신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길....
내 능력 안에서 가능한 길 만을 생각하리라.
마음이 분주하다.......... 마음의 길을 내는 시간.
아직은 바람의 끝에 찬기운이 있는데 거리의 나무들은 조금씩 연두를 입고 있었다.
나무들은 그렇게 끝없이, 변함없이 하늘을 향해 길을 내고 있었다. 흔들림 없이, 동요하지 않고...
4월이다....... /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려원 산문집/ 2024.12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