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날의 나와 지금의 나...
< 구명조끼 >
이정록
검정 고무신 꺾어 자동차 놀이 할 때, 각자 싣는 게 달랐다. 명근이는 텃밭 흙을, 용욱이는 마른 모래 한 고봉을, 정두는 나사와 부러진 망치 대가리를, 나는 풀꽃을 꺾어 넣고 언덕길을 달렸다. 정두는 공대를 나와 자동차 회사에 나가고, 명근이는 경운기 탕탕거리며 소를 키운다. 용욱이는 막다른 골목까지 배달 도시락을 나르고, 나는 풀벌레 소리며 눈물 그렁그렁한 시를 꿈꾼다. 이럴 줄 알았다면 할머니 금반지며 삼촌 주판알을 가득 채우고 부룽거릴걸. 하지만 흙탕물 채우고 소방차를 몰던 기활이는 저수지에 들어간 뒤 쉰 넘어까지 나오질 않는다. 시란 걸 쓰고 읽을 때마다 나는 행간에 구명조끼가 있는지 두리번거린다. 홍수에 떠내려가는 암소의 마른 등, 그 등짝에 기활이가 앉아 있는지를.
(시집 ‘그럴 때가 있다’, 창비, 2024)
책꽂이를 정리하다 우연히 마주치는 아이들의 글.
한 강의실에서 같은 의자에 앉아 같은 수업을 들었던 그 아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이들이 공책에 적어놓은 꿈은 현실이 되었을까?
아직 이루지 못하였다면 그 아이들은 더디지만 날마다 조금씩 꿈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겠지.
이정록 시인의 시 <구명조끼>에서
검정 고무신으로 자동차 놀이하던 어린 시절. 명근이는 흙을, 용욱이는 마른 모래를, 정두는 나사와 부러진 망치대가리를, 시적화자인 나는 풀꽃을 넣고 고무신 자동차를 달리며 놀았다. 어른이 된 명근이는 소를 키우고 경운기를 몰고, 용욱이는 도시락 배달, 정두는 자동차회사에 다니고 나는 눈물 그렁그렁한 시를 쓴다. 흙탕물 가득 채우고 소방차를 몰던 기활이는 쉰 넘도록 저수지에서 나오질 않는다.
시인이 된 나는 행간에 구명조끼가 있는지를 두리번거린다. 누군가를 시(時)로 질식시키지 않기 위해. 행과 행사이 숨을 쉴 여백을 두어야 한다. 다그치지 않고, 몰아세우지 않고, 강요하지 않고.......
어린 시절, 선생님이었던 아버지는 그 시대 여자아이들이 흔히 하는 소꿉놀이나 인형놀이를 싫어하셨다. 그래서였을까. 나뭇잎, 작은 열매, 모래, 나뭇가지 등을 모아 반찬을 만들고 먹는 시늉까지 하던 여자아이들의 그 흔한 소꿉놀이를 실제 해보지 못하고 구경만 하곤 하였다. 학교 앞 문구점에는 바비인형 같은 늘씬한 인형과 인형옷을 세트로 팔곤 했다. 여유가 있는 친구들은 상당히 비싼 가격이 적힌 인형 세트를 아무 부담 없이 샀다. 그 인형을 안고 가는 친구의 모습이 부러웠다. 내 마음에 드는 인형을 행여 누군가 사버릴까 걱정하면서 하교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구점 앞을 서성이곤 했다.
아버지가 인형을 사줄 형편이 안되어서 내가 인형을 갖지 못한 게 아니었다. 금발머리 인형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를 치장하는 놀이가 아버지 눈에는 의미 없어 (어쩌면 한심하게) 보였으리라.
아버지 마음에 드는 모습은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이었다. 그의 시선을 의식하며, 칭찬을 기대하며 줄기차게 책을 읽었다. 아버지가 근무하던 고등학교 도서관에 따라가서 읽기도 어려운 내용의 책들을 고르고 그림이 그려진 페이지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보면서 내용을 상상하기도 했다.
내 문학의 기본은 아마도 그 어린 시절에 정립된 것일 지도 모른다. 습관적으로 읽어대던 책들...
알게 모르게 각인된 독서 습관...
꾸준히 모은 돈으로 드디어 학교 앞 문구점에 내가 오래도록 찜해둔 인형을 사러 갔다.
“어서 오너라.”
“저 빨간 옷 입은 인형 주세요.”
“그래? 부모님이 사주시는 거야?”
문구점 아저씨는 지나가면서 눈팅만 하던 나를 용케 기억하고 있었다.
빨간 옷을 입은 금발머리 인형을 가방에 넣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처음엔 인형을 소유했다는 사실이 설레었으나 집이 가까워질수록 걱정이 앞섰다.
분명 용돈을 모아 산 것이고, 내가 그토록 원하던 인형을 샀음에도 인형 옷 갈아입히고 머리빗질하는 놀이를 매우 싫어하시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죄지은 아이처럼 아버지 퇴근 전에 인형을 깊숙이 감춰두었다.
하루 중 내가 그 인형을 꺼내 놀 수 있는 시간은 몇 시간도 채 안되었다.
소유하기 전에는 그토록 예쁘게 보이던 인형이 막상 소유하고 나니 시시해졌다.
갈아입힐 여벌의 옷도 없거니와 인형의 팔과 다리 관절이 꺾이긴 해도 늘 같은 포즈와 같은 표정의 인형을 바라보는 것도 점점 지루했다.
그 인형은 어떻게 되었을까? 특별히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아마도 흐지부지 버려졌으리라.
인형놀이나 소꿉놀이 대신 의무적, 자의적으로 책을 읽어서일까?
어른이 된 나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책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엄격했던 아버지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찬란한 봄날..... 지금은 세상에 없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어린 딸이 당시 여인들 삶의 축소판 같은 소꿉놀이나 인형 옷 갈아입히기 놀이에 빠지지 않고 리더가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는 선지자였을까?
시인의 말처럼 나도 글을 쓰고 읽을 때마다 행간에 구명조끼를 만들어두려 한다.
누군가를 위해서.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서..........
세상밖으로 달려 나간 아이들... 그 아이들이 자기 생의 행간에서 구명조끼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봄볕에 연둣빛이 짙어진다. 덩달아 새들도 신이 났다. /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12
2022 아르코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