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피로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스스로 호모사케르!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피로 사회』/한병철

“피로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


한병철 교수는 『피로 사회』에서 현대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적대성 내지 부정성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냉전, 면역학, 규율사회)에서 그러한 부정성이 제거된 사회, 부정성 대신 긍정성이 지배하는 사회로의 변화가 20세기 후반 이후 일어났다고 이야기한다. 이 새로운 사회를 성과사회라 칭하고 이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을 성과주체라고 명명한다. 과거의 사회가 금지(“해서는 안 된다”)에 의해 이루어진 부정의 사회였다면,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는 것이 최상의 가치가 된 긍정의 사회이다. 이 사회에서는 성공하라는 것이 남아 있는 유일한 규율이며, 성공을 위해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긍정의 정신이다(“Yes, we can!”). 그러나 부정성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긍정성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귀결되며 타자의 위협이나 억압과는 다른 의미에서 자아를 짓누른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자아는 피로해지고, 스스로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좌절감은 우울증을 낳는다. 한병철은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라고 결론짓는다.

20250414_150559 (2).jpg

# 신경성 폭력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

21세기의 시작은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 규정할 수 있다.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P17

폭력은 부정성에서뿐만 아니라 긍정성에서도 나올 수 있다. 이질적인 것, 낯선 것뿐만 아니라 같은 것도 폭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보드리야르 “ 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자는 같은 것으로 인해 죽는다.”

보드리야르는 현재 모든 시스템(정보, 커뮤니케이션, 생산)은 비만 상태라고 규정하고 궁핍한 시대에 사람들은 흡수와 동화에 관심을 가지지만 과잉의 시대에 이르면 거부와 배척에 관심을 갖는다고 말한다.


P 21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우울증. 주의력 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다.


#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 해서는 안된다.’가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양산한다.

알랭 에랭베르( Alain Ehrenberg)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한다.

“우울증이라는 병은 권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해 인간에게 사회 계급과 성별에 따른 역할을 부여하는 규율적 행위 조종의 모델이 만인에게 자기 주도적으로 될 것, 자기 자신이 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규범으로 대체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

한마디로 에랭베르는 우울증을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후기근대적 인간의 죄절에 대한 병리학적 표현으로 정의하지만 실제로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책임과 주도권이 아니라 후기 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이다.

주권적 초인이 아니라 그저 노동만 하는 최후의 인간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신을 착취한다.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착취자임과 동시에 피착취자가 된다.


# 깊은 심심함

긍정성의 과잉은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멀티태스킹은 수렵 자유구역의 동물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습성이므로 멀티태스킹이 문명의 진보를 의미한다고 보기 어렵다.

P32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불렀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벤야민은 꿈의 새가 깃드는 이완과 시간의 둥지가 현대에 와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고 한탄한다. 심심함이란 ‘속에 가장 열정적이고 화려한 안감을 댄 따뜻한 잿빛 수건이다. “

그리고 ”우리는 꿈꿀 때 이 수건으로 몸을 감싼다. “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은 깊은 사색적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두므로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에게는 그런 능력이 주어지지 않는다.


# 활동적 삶 Vita activa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 사회는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격하시키는 노동사회로서 행동의 모든 가능성을 파괴해 버린다. 근대의 인간은 익명적 삶의 과정에 수동적으로 끌려가고 있다.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서사화되었으며 (근대에 이르러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 줄 이야기가 붕괴되었다는 의미) 이로 인해 삶은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든다.

오늘의 삶은 호모 사케르의 삶보다 더 많이 벌거벗겨졌다. 호모사케르는 본래 어떤 범죄로 인해 사회에서 추방당한 자를 뜻한다. 사람들은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얼마든지 그를 죽일 수 있다. 호모 사케르는 아감벤에 따르면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생명이다. 예를 들면 강제수용소의 유대인. 관타나모 수용소의 포로들, 신분증명 서유가 없는 사람들. 추방을 기다리는 난민들, 중환자실의 환자들이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사케르라 할 수 있다.

후기 근대의 성과사회가 우리 모두를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시켜 버린다면 사회의 변방이나 예외 상태에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배제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호모사케르인 셈이다. 하지만 성과 사회의 호모 사케르는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죽일 수 없는 존재라는 특성이 있다. 다시 말하면 죽지 않는 자들 Untote이다. 강제 사회에서는 모두가 저마다의 노동 수용소를 달고 다니는데 그 노동 수용소의 특징은 한 사람이 동시에 포로이자 감독관이며 희생자이자 가해자라는 점에 있다. 인간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 보는 법의 교육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 가지 과업을 거론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눈을 평온과 인내, ’ 자기에게 다가오게 하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취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한마디로 니체가 말하려는 것은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

’머뭇거림‘은 긍정적 태도는 아니지만 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기계는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가속화와 활동 과잉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분노하는 법을 잊어가고 있다.

분노는 현재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분노의 전제는 현재 속에서 중단하며 잠시 멈춰 선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 간다.

짜증과 분노의 관계는 공포와 불안의 관계와 유사하다. 공포가 특정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P 53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은 힘은 없다면 치명적인 활동 과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 돌이켜 생각하기‘는 불가능해지고 긍정성이 과잉은 오직 ’계속 생각해 나가기‘만을 허용한다


# 피로사회

피로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 모리스 블량쇼

성과 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한트케가 <피로에 대한 시론>에서 이야기한 분열적인 피로다.

”둘은 벌써 끝없이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각자 자기에게 가장 고유한 피로 속으로 빠져들었다. 우리의 피로가 아니었고 이쪽에는 나의 피로가, 저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는 꼴이었다.

모든 공동체, 공동체의 삶, 모든 친밀함, 심지어 언어마저 파괴하는 피로는 폭력이다.

한트케는 보고 또 보이는, 만지고 만져지는 관계의 복원을 이야기하면서

“접근을 허락하는 피로, 만져지고 또 스스로 만질 수 있는 상태를 실현하는 피로를 통해 비로소 머물러 있게 되고 한 곳에서의 체류가 가능해진다. "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무위의 피로다.

성과 사회의 호모 사케르는 ”죽을 수 있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살 수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는 것이다."


20250414_172736.jpg
20250414_172758.jpg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p256~ 불과 재의 변주

도나 마르코바는 ”삶을 살지 않은 채로 죽지 않으리라, 넘어지거나 불에 델까 두려워하며 살지 않으리라. 나는 나의 날들을 살기로 선택할 것이다. “라고 이야기했다.

아모즈 오즈의 『나의 미카엘』에서 한나는 “이제는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죽고 싶지 않다.”라고 외친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몸 안에 불과 재를 모두 지닌다.

호모 사케르처럼 자신을 착취하면서 끝없이 자신을 태워 재로 만들면서도... 또다시 불을 갈망한다. 불로 태우면 재가 남으리라는 것을 알면서...

한병철은 『피로 사회』에서 깊은 심심함을 갖지 못하는 존재. 머뭇거림이 결여된 존재의 불행에 대해 이야기한다.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하지만 현대인들이 머뭇거림을 알지 못해서도 깊은 심심함에 대한 사색을 원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를 부화시킬 의지가 없어서도 아니다.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해도 뒤처지는 듯한 현실을 무력한 우리가 스스로 극복해 내기는 어렵다.

사회를 움직이는 거대한 피로의 시스템을 해결하지 않고서 개인에게 착취, 결핍, 우울증, 신경증, 짜증의 단어를 가져다 붙여서는 안 된다. 성과 주체로서의 개인 탓이 아니다.

죽을 수 있다고 보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살 수 있기에는 이미 죽어버린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또다시 피로의 한 복판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자기 생의 정언명령 같은 본질이라면 말이다.

성과 사회의 호모 사케르는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죽일 수 없는 존재라는 특성이 있다. 다시 말하면 죽지 않는 자들 Untote이다.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 착취자인 동시에 착취를 당하는 자인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는 자들처럼 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슬프지만 말이다. 머뭇거릴 시간도 없이....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20241226_170938.jpg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keyword
작가의 이전글우리는 이미 배를 불태워버리고 말았다.용감해지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