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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도시의 발광을 벗어나 ‘이렇게 이렇게 함께’의 세상이 다시 오기를

숲 / 정희성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수많은 이들이 스쳐 지나가는 거리...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어도 숲을 이룬다.

이 메마른 땅을 지나치며 마주하는 우리들은 숲이 아니다.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닐까.

사람들은 제각각 어디론가 가고 있다. ‘어디론가’.... 생의 목적에 띠라 생의 방향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숲에서 나무들은 바람의 결에 따라 같은 뱡향으로 움직인다.

숲에서 살아가는 목적도, 그 목적에 따라 정해지는 방향도 바람의 결에 따른다

숲이 될 수밖에 없다.

그대와 나는... 스쳐 지나치고 마는 우리는 숲이 아니다.



클림트 사과나무.jfif

숲 / 강은교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셋도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이

나무들이 흔들리고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

강은교 외, 『그녀의 푸른 날들을 위한 시』,


흔들리고 고개를 젓고...

이렇게 이렇게 함께 일 때 나무들의 꿈도 하나가 된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일 때...

우리는 수없이 흔들린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 앞에서 고개를 갸웃하고 고개를 젓는다

각자 흔들리고 각자 젓는다. 나의 흔들림이 너의 흔들림에 영향을 주지도

나의 고개 저음이 너의 고개 저음에 영향을 주지도 않는다

이렇게 이렇게 우리는 따로...

제각각


광화문 네거리엔 전광판이 많다

/ 손택수


비가 오려나

하늘을 보는데

옥외 전광판이 보인다

풀 컬러 고해상도로

발광하는 건물들

시사뉴스와 광고와 스포츠 영상을 끝없이

전송하고 있다

잠시도 무료할 틈이 없는 거리

.....

광고 하나 나 하나

광고 둘 나 둘

리모컨으로 꾸욱 눌러 꺼버릴 수도 없는 전광판을 헤며

밤을 지새우기도 하겠구나

신호동 앞에서 잠시 넋을 잃고 이마 위로 투둑

빗방울이 떨어진다
...

후략


비가 오려나 올려다본 하늘...

전광판들이 발광 중이다. 잠시도 무료할 틈도 없이

별 하나 나 하나 대신 광고 하나 나 하나를 세는 도시에서

우리는 주머니 속에 리모컨을 하나씩 들고 다니는 사람들

발광하는 도시에서 발광하는 전광판 아래를 지나 저마다의 주머니에서 무료할 틈도 없이 발광하는 폰... 절규하는 폰....


비가 내렸다

5월 첫날에도 제법 거센 비가 내리더니 오늘도 비가 내렸다.

연두가 조금 더 짙어졌다.

비가 그친 하늘. 나무들이 해사한 얼굴을 내밀고 있다. 바람에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며

고개를 젓고 고개를 끄덕이고... 한 무더기의 초록이 창에 가득 차 있다.

무엇을 하는지 모르게 시간이 간다.

정희성의 <숲> 왜 그대와 나는 숲이 아닌가 오래도록 화두로 삼아볼 만한 문장이다.

왜 우리는.... 언제부터 우리는

숲이 아니었을까? 본래는 하나였을 터인데.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일상 속.... 뉴스를 보는 것이 혐오스러운 날들

도시의 발광을 벗어나 ‘이렇게 이렇게 함께’의 세상이 다시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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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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