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힘 제7 강 < 사랑과 결혼 이야기>
나를 살게 하는 힘, 끝없이 누군가를 그리고 무언가를 사랑하는 것
신화의 힘 제7 강 < 사랑과 결혼 이야기>
사랑은 눈과 눈을 통하여 마음을 얻는다. 눈과 눈은 마음의 척후병이라서 마음이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를 염탐한다. 이렇듯 서로가 하나가 될 때, 두 눈과 마음이 한 덩어리가 될 때, 두 눈이 본 것을 마음이 좋게 여기므로 여기에서 온전한 사랑이 태어난다. 오로지 마음이 움직이는 데서만 태어나거나 시작될 뿐, 사랑은 다른 데서는 태어나지도 시작되지도 않는다.
두 눈이 마음에서, 두 눈과 마음이 기쁨을 누리는 덕에. 두 눈과 마음이 그리하기를 바라는 덕에 사랑이 태어난다. 진정한 사랑에 빠진 자는 사랑이, 가슴과 눈과 눈에서 태어나는 온전한 정성임을 알기 때문에 사랑이 다름 아닌 희망임을 알기 때문에 서둘러 연인에게로 달려간다. 그러면 눈은 꽃을 피우고, 가슴은 꽃을 성숙하게 하는데. 이 성숙한 열매에서 여무는 씨앗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한다. - 귀로 드 보르네이유
미네 ( Minne) ‘사랑’을 뜻하는 중세 독일어
중세 음유시인들은 사랑의 심리에 집중한다. 그들 이전에 사랑은 에로스적 사랑과 아가페적 사랑이었다. 아모르가 개인적 사랑이라면 에로스, 아가페적 사랑은 비개인적인 사랑이다.
에로스적 사랑이 충동에 따르는 것이니까 개인적 열정이라 할 수 없듯, 아가페적 사랑도 사랑보다는 자비에 더 가까운 개념이다.
인도의 사랑의 신은 활과 화살통을 든 덩치 크고 힘 좋은 청년인데, 청년이 지닌 화살은 ‘죽음의 고통이 따르는 고뇌’ ‘개안’등으로 불린다. 이 사랑의 신이 쏜 화살에 맞으면 누구든 육체적, 심리적 폭발을 경험하게 된다. 이와 달리 아가페적 사랑은 이웃이 누구든 상관없이 내 몸처럼 대하는 사랑이다.
아모르적 사랑은 순수하게 개인적 성격을 띤 사랑, 눈과 눈이 만나는데서 싹트는 사랑, 개인 대 개인의 사적인 경험이다. 사랑을 경험하겠다는 용기, 자기만의 경험에 뛰어드는 것이다.
남들에게서 이어받은 체험이 아닌 자기만의 체험, 체험에서 우러난 신념을 중요시한다. 사랑에 대한 개인적 체험은 획일적 체계를 무너뜨리는 데 이를 ‘크레도에 대한 리비도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크레도’는 ‘믿습니다’로 시작하여 ‘믿습니다’로 끝난다. 교리만 믿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만든 가르침 그대로라는 것까지 믿겠다는 의미다. ‘리비도’는 ‘삶의 충동’이다. 타인을 향해 열려야 할 우리의 가슴에서 나온 것이다.
중세시대 결혼은 교회로부터 축복받을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인데 교회가 정해준 결혼에서 육체적인 하나 되기는 정신적 하나 되기를 확증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다. 결혼은 육체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에서 유모는 ‘사랑의 묘약’을 마셔버린 트리스탄에게 달려가
“그대는 죽음을 마셨다.”라고 말한다
트리스탄은 이에 “죽음이라니.... 이 사랑의 고통 말이요.”
라고 답한다.
트리스탄은 자기의 사랑은 죽음보다, 고통보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귀하다고 생각한다. 지옥에서 영원히 벌과 저주를 받는 한이 있어도 사랑의 고통을 선택하겠다는 의미다.
무슨 일이 생기든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것이다.
바그너는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지.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기사 시대에 사랑놀음의 주도권을 쥐고 규칙을 허무는 권리는 여성에게 있었다. 여성이 자기 몸을 기꺼이 내어놓는 걸 기술적 용어로 ‘메르스( merci)’라고 한다. 여성이 베풀 수 있는 메르시는 여성이 그 후보자의 격을 어느 정도로 평가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여성은 자기를 좋아하는 남성에게 사랑을 수용할 만한 가슴이 있는지, 사랑의 상대가 될 자격이 있는지 여부를 끊임없이 시험한다.
사랑을 수용할 만한 다정한 가슴의 의미는 ‘자비(compassion)’를 수용할만한 마음이다.
자비는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의미. 여성은 남자가 자기와 사랑의 고통을 함께 할 수 있는가를 테스트하는 셈이다. 여자가 자기의 일부를 허락하기 전에 애인을 죽음터로 내보내는 무자비한 여자를 프랑스말로 ‘소바주(sauvage)’라고 부르는데 야만적이란 의미이다. 또한 시험도 해보지 않고 자신을 허락하는 여자도 ‘소바주’라고 부른다.
아모르는 내 앞에 있는 길이다.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해 사랑은 가슴을 얻는 것이다.
눈과 눈이 만나는 순간의 짜릿함, 그 후에 찾아오는 고통의 순간... 음유시인들은 사랑의 고통, 의사가 낫게 할 수 없는 고뇌, 그리고 그렇게 해서 받은 상처를 찬양했다. 그 상처는 거기에 그 상처를 낸 바로 그 무기를 통해서만 나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데서 생긴 고통과 고뇌를 낫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고통과 고뇌를 안긴 사람뿐이라는 의미다.
성배전설에서는 성배가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해석되는데 성배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 있던 술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피를 받은 그 술잔을 지칭한다.
성배는 중립을 지킨 천사들이 가져온 것이라고 볼 때 이 성배는 한 쌍의 대극, 욕망과 공포의 사이, 선과 악의 사이로 난 영적인 길을 상징한다.
성배 이야기의 테마는 인간의 내적 관심이 떠나버린 땅이나 나라를 그 무대로 하는데 인간의 내적 관심이 떠나버린 땅, 황무지는 사람들이 살긴 살되 죽은 삶을 살고 있는 땅, 자기 삶에 대해 아무 용기도 없이 사는 땅, 남이 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사는 땅이 바로 황무지다.
황무지의 거죽은 실제성을 표상하지 못한다.
황무지 사람들은 죽은 삶을 살기 때문에 “나는 평생을 하고 싶은 일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나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았다.”라고 말한다.
성배는 참 삶을 산 사람들이 획득한 것, 깨달은 것을 표상, 인간 의식의 가장 고귀한 영적 잠재성의 성취를 상징한다.
토마스 만은 “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존재인 것은 바로 인간에서 물질과 정신이 만나기 때문이다.”
성배는 자기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세계로 사는 참 삶을 상징한다.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야 나아가는 삶이다.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실’이다.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심을 다하는 것, 속이지 않고 약점을 따지지 않는 것...
청교도들은 결혼을 ‘교회 안의 작은 교회’라고 불렀다.
결혼을 하면 날마다 사랑해야 하고 날마다 용서해야 하니까, 사랑과 용서의 현재진행형 성사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아내에게 헌신한다면 그것은 아내라고 하는 여성에게 헌신하는 것이 아니다. 나와 아내가 이루고 있는 관계에 헌신하는 것이다.
사랑에는 기쁨만 있는 게 아니라 슬픔도 깃들여 있다.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이다.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것이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 신화의 힘 <제7강 > 발췌
사랑에 대하여
칼릴 지브란
사랑이 그대를 부르면 그를 따르라.
비록 그 길이 험하고 가파를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들을 감싸 안을 때 전신을 허락하라
비록 사랑의 날개 속어에 숨은 칼이 그대들을 상처받게 할지라도
...
사랑이란 그대들에게 영광의 관을 씌우는 만큼
또 그대들을 괴롭히는 것이기에
사랑이란 그대들을 성숙시키는 만큼
또 그대들을 베어버리기도 하는 것이기에.
<빨강 수집가의 시간> 부분
나를 살게 하는 힘은 끝없이 누군가를 그리고 무언가를 사랑하는 열정이다.
“우리는 사랑을 만나기 위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교훈을 찾는 것도 아니요, 위대해지는데 필요하다는 그 어떤 쓰디쓴 철학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태양과 입맞춤과 야성과 향기 외에는 모든 것이 헛된 것으로 여겨진다. ”
- 알베르 카뮈 < 티파사에서의 결혼 > 부분
내 안의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지 않기 위해 끝없이 사랑의 불씨를 살리는 일.
감동하는 일, 설레는 일, 고통에 동참하는 일, 마음의 황무지를 거부하는 일, 나답지 않게 사는 삶을 거부하는 일, 나로 살지 못함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사랑의 움직임에 민감해지는 일...
거쳐온 사랑을 딛고 성장해 온 삶이다.
돌아보면 제각각 형태와 모양과 향기가 달랐던 사랑들,
그 사랑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어떤 형태로든 잠복되어 내 피를 타고 혈관 곳곳을 돌아다닌다.
끝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한, 그 어떤 사랑의 고통에 대해서도 수용할 수 있는 한
죽지 않는 셈이다. 날 것의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랑의 결과물을 요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랑은 눈과 눈을 통하여 마음을 얻는다. 눈과 눈은 마음의 척후병이라서 마음이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를 염탐한다.... 두 눈이 본 것을 마음이 좋게 여기므로 여기에서 온전한 사랑이 태어난다. 오로지 마음이 움직이는 데서만 태어나거나 시작될 뿐, 사랑은 다른 데서는 태어나지도 시작되지도 않는다.... 진정한 사랑에 빠진 자는 사랑이, 가슴과 눈과 눈에서 태어나는 온전한 정성임을 알기 때문에 사랑이 다름 아닌 희망임을 알기 때문에 서둘러 연인에게로 달려간다. 그러면 눈은 꽃을 피우고, 가슴은 꽃을 성숙하게 하는데. 이 성숙한 열매에서 여무는 씨앗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한다. - 귀로 드 보르네이유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부분
마주 보는 이의 눈과 눈을 통해 마음을 얻고.. 눈은 꽃을 피워내고 가슴은 꽃을 성숙시키고, 성숙한 열매에서 여무는 씨앗, 즉 사랑을 획득하게 된다.
5월이다. 오므린 장미 봉오리...
일시에 터져 나올 것 같은 세상의 모든 뜨거운 것들.
장미의 계절이 오고 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렸을 때는 내게 사랑하는 힘이 넘쳤지만 이제는 그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
아모스오즈 <나의 미카엘 > 중에서...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한나의 목소리 속에 나의 목소리를 듣는다.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12
<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