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밖에 있는가, 우물 안에 있는가.. <빨강 머리 여인> 오르한 파묵
<빨강 머리 여인> 오르한 파묵
신문들은 불길한 분위기로 우물의 깊이, 바닥에 있는 진흙탕, 아주 오래전 삽과 곡괭이로 그처럼 깊은 우물을 팠다는 것에 대해 기이하다고 썼다. 엔베르가 유산 때문에 아버지(젬)를 살해했고 그 배후에 내가 있다고 확신했다.
잠수부가 이틀 만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젬의 시신을 끌어올렸고... 부검결과 우물에 떨어지기 전에 사망했다는 단서를 얻었다.
다음날 1면 의학보고서를 실은 신문들은 ”아버지의 눈을 쐈다. “라고 기사를 실었다
잠수부가 크륵칼레 권총을 건져 올렸고 이 권총이 젬의 것이고, 왼쪽눈을 관통한 총알이 이 권총에서 발사되었음이 입증되면서 아들의 정당방위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우물가에 무기를 가져간 사람은 분노한 아들이 아니라 아들을 두려워한 아버지였다는 사실.
오르한 파묵의 <빨강 머리 여인>은 속도감 있고,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출간 즉시 터키에서만 40만 부가 팔리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이 책의 첫 문장
사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야기할 사건이 있은 후 지질학 엔지니어 겸 건축업자가 되었다.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 페르시아의 고전 <왕서>를 엮어 내며 신화 속 아버지와 아들을 현대로 불러들인다. 1부에서는 주인공 젬이 우물을 파러 떠났다가 인생을 통째로 뒤흔든 사건을 맞닥트리고 돌아온다. 2부에서는 과거를 등진 채 남다른 성공 가도를 달리던 젬이 지난날 완전히 묻어버렸던 과거를 마주하게 된다. 3부에서는 이 모든 갈등의 키를 쥐고 있는 빨강 머리 여인이 직접 등장하여 모든 인과관계를 담담히 설명한다.
이스탄불에 사는 주인공 젬은 고등학교 1학년이던 어느 날 이후 아버지(아큰)를 영영 보지 못한다. 아버지가 사라진 후 가정의 생계가 어려워지자 젬은 대학 준비를 위한 학비를 벌기 위해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우물을 파는 일을 하러 이스탄불에서 30마일 떨어진 왼괴렌으로 마흐무트 우스타와 함께 떠난다.
천공기도 없던 시절, 뙤약볕에서 땀을 흘리며 흙과 식물의 모양새를 보며 우물 팔 자리를 가늠하고, 삽으로 직경 2미터의 원을 파 내려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물을 파는 기술자 우스타는 언제나 비밀스러웠던 아버지와 달리 밤마다 젬에게 신화와 사실이 뒤섞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우물을 파는 방법과 기술을 가르치고, 아들을 대하듯 갖가지 조언도 해 준다. 그렇게 젬은 천천히 그를 아버지처럼 여기기 시작하며 종종 순종과 반항 사이를 오가게 된다.
땅은 마치 일곱 층으로 된 하늘처럼 층층으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물을 찾는 엣 우물파기 명수들은 땅, 풀, 벌레 심지어 새들의 언어를 이해해야 했고 그 위를 걸을 때 아래 있는 바위 혹은 진흙 층을 감지해야만 했다.
“ 우물의 원은 아주 정확해야 한다. 원이 완벽하게 둥글지 않고 각이 지면 벽이 완성되지 않아. 무너지고 말지.”
마흐무트 우스타는 말했다.
역광장에 이르렀을 때 어느 집 문이 열리고 청바지를 입은 중년여성이 밖으로 나오고.. 뒤이어 젊은 남자, 그의 누나처럼 보이는 큰 키의 빨강머리 여인인 나타났다. 다운.. 빨강머리 여인은 나와 내 뒤에 있는 늙은 말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의 둥글고 아름다운 입술에서... 기이한 무언가를 감지한 듯한 슬픈 미소를 보았다.
마흐무트 우스타는 “멍청한 조수는 우물 바닥에 있는 사람을 불구로 만들고, 부주의한 조수는 죽이고 말지. 명심해 네 눈과 귀는 항상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걸.”
“아버지라는 사람은 공정해야 한단다. 공정하지 못한 아버지는 자식의 눈을 멀게 만들지.”
그는 왜 장님이 된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었을까? 이 주제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요셉이 우물 바닥에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남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까? 나는 오랜 세월 동안 나 스스로에게 수없이 이 질문을 했다. 이 이야기가 왜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왜 그토록 우스타에게 화가 났을까?
저녁마다 왼괴렌에 가면 빨강 머리 여인을 우연히라도 보고 싶었다.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행복하게 사는 상상을.. 이런 상상들이 머릿속에서 들꽃처럼 피어났다.
“조수를 믿지 못하면 우물 파는 명수가 될 수 없단다. 명수는 지상에 있는 아이가 모든 것을 옳고 반듯하게 제시간에, 주의 깊게 한다는 것을 확신해야 일에 열중할 수 있지.. 우물 파는 사람은 아들을 믿는 것처럼 조수를 믿어야만 한다.... 나의 스승은 아버지였어. 너도 유능한 조수가 되고 싶으면 내 아들이 되어야 한다.”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빨강머리 여인과 그의 가족이 광장을 지나가고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본 빨강머리 여인은 생각보다 아름답지 않았다. 하지만 동그랗고 아름다운 입술과 눈길에는 삼 주가 넘게 계속되는 우물 파는 일을 견디게 한 다정다감하고 장난기 가득한 달콤함이 어려있었다.
우물에서 나온 흙은 더 노랗고 가벼웠다. 자개 같고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유리병처럼 깨지기 쉬운 부드러운 조각들, 내 피부색과 같은 수백 년 된 자갈들, 반투명한 조개껍질들... 부석처럼 물에 뜰 듯 가벼운 돌멩이들이 섞여 팔수록 물에서 더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무더위로 숨을 쉴 수 없었던 7월 어느 날 정오에 소형 트럭을 타고 온 하이리 씨는 상황이 절망적인 것을 보고 우리 모두를 비통하게 만드는 말을 했다. 사흘 안에 어떤 결과를 얻지 못하면 이 우물에서 물이 나올 거라는 희망을 접고 작업을 중지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마흐무트 우스타가 계속하겠다면 그것은 알아서 할 일이라고, 그러나 사흘 뒤에도 여전히 물이 나오지 않으면 하이리 씨는 마흐무트 우스타에게도 알리에게도 일당을 주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내 자리에서 꿈쩍 않고 얼굴을 위로 향한 채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위에 마흐무트 우스타가 보이면 이곳 땅 밑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우스타가 양동이를 비우기 위해 가장자리로 물러나면 우물 입구에 동그랗고 아주 작은 하늘이 보였다. 너무나 멋진 파란색이었다! 거꾸로 본 망원경 끝에 있는 세상처럼 멀지만 아름다웠다.
아버지가 우릴 떠났어
“그렇다면 너한테 아버지 노릇을 하지 않은 거잖아. 너도 다른 아버지를 찾아. 국가라는 아버지, 신이라는 아버지, 장군 아버지, 마피아 아버지. 여기서는 아무도 아버지 없이 살지 못하니까.
"아버지 이름이 뭔데?"
”아큰 첼리크“
빨강 머리 여인은 생각에 잠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물 파는 일이 끝나면 그녀를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자 벌써부터 마음이 아파왔다...
그녀는 서른세 살.. 그러니까 내가 산 것보다 정확히 두 배를 살았다. 하지만 열 배는 산 사람 같았다.... 빨강 머리 여인과 잤다는 것은 내게 자신감을 불어넣었고 못할 게 없다는 느낌마저 주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점심 휴식시간에 단걸음에 왼괴렌으로 가서 빨강머리 여인을 봐야지 생각했다. 줄이 풀어지지 않게 도르래를 잠그고 꽉 찬 양동이를 받아 선반에 놓으려는 순간 양동이가 갈고리에서 빠져 아래로 떨어졌다.
”우스타“
우물 바닥에서 비명이 들리더니 잠잠해졌다.
다리가 덜덜 떨려 광장으로 달렸다. 마흐무트 우스타가 죽은 것인지, 다친 것인지... 풀로 덮인 구비에서 서둘러 지나가려는 거북이를 보았다. 거북이는 내가 곧 지나갈 길을 운명처럼 선택하고 도망치려 했다. 나 역시 거북이처럼 내 운명에서 도망치려 하면서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인가?
우물을 감히 내려다보지 못했다. 내려다보면 눈이 멀 것 같았다.
서둘러 짐을 챙겨 12시 30분에 도착하는 이스탄불행 기차를 타러 역으로 달렸다.
기차가 역으로 들어얼 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광장과 왼괴렌 마을을 바라보고는 다급하게 기차에 올랐다. 객차에 앉을 때 내 마음은 자존심을 누르고 우스타에게 복종한 모든 시간을 잊었고 끝없는 죄책감이 가득했다.
P. 170 내 안의 어떤 죄책감, 어떤 사악함을 모른 체하면 마침내 서서히 그것을 잊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는 척하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면, 그리고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결국 정말로 아무 일도 없는 것이다.
P. 201 내가 한동안 달력을 바라보고 있을 때 늙고 세상 풍파를 다 겪은 듯 보이는 집주인이 내 곁으로 왔다. 나는 이 그림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물었다. 그가 말하길 『왕서』에서 뤼스템이 아들 쉬흐랍을 죽인 후 아들 때문에 우는 장면이라고 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떻게 모를 수가 있소?” 하는 자긍심 가득한 표정이 깃들어 있었다. 이란 사람들은 서양화 때문에 과거의 시인들과 전설들은 잊어버린 우리 터키인들과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특히 시인들을 잊지 않는다.
P. 218 우리는 강하고 결단력 있는 아버지가 우리에게 무엇은 하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말해 주기를 바란다. 왜 그럴까?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와 관련해 무엇이 도덕적이며 옳고 무엇이 죄악이며 그르다는 결정을 내리기 어렵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확인해야 하기 때문일까? 우리는 항상 아버지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아니면 머릿속이 혼란스럽거나 우리 세계가 허물어졌을 때, 우리 영혼이 번민에 찼을 때만 아버지를 원하는 것일까?
P. 263 궁금증이 나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지만 앞으로 내가 알게 될 것들 때문에 움츠러들기도 했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많은 노력을 했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바닥을 알 수 없는 회한으로 마음이 암담했다.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무언가에 대해 비난을 받는 공포는 꿈에서나 경험하는 두려움의 일종이다. 이러한 느낌을 아주 자주 받았다.
삼십 년 전에 텅 빈 땅이었던 비탈길 꼭대기의 ‘우리 평지’는 육칠 층짜리 아파트들, 창고 건물들, 주유소들, 아래층에 식당, 케밥 가게, 슈퍼마켓이 꽉 들어찬 콘크리트 숲으로 변해 있었다. 우리가 밭을 가로질러 지름길로 이용하던 굽이진 길들은 고층 아파트들 때문에 보이지 않아 우리가 우물을 파던 곳이 어디인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쉬흐랍과 뤼스템 이야기가 얼마나 친숙하고 오이디푸스이야기와 비슷한지는 한 걸음 떨어져서 냉정하게 생각하면 바로 알 수 있다.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와 쉬흐랍의 이야기 사이에는 놀랄 만큼 비슷한 점들이 있다. 하지만 차이점도 있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는 반면, 쉬흐랍은 아버지에게 죽는다. 하나는 부친 살해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자식 살해 이야기다. 그러나 이 커다란 차이점은 공통점을 더욱더 강조한다.
P. 193 대체로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아니 그들보다 더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가끔 나 자신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고 되뇌기도 했다. 나는 마흐무트 우스타와 어린 시절의 죄를 특히 비행기 여행을 할 때 가장 많이 떠올렸다. 이따금 벵가지에, 아스타나에, 바쿠에 혹시 내가 마흐무트 우스타를 기억하기 위해 가는 것일까 진심으로 궁금해하곤 했다. 비행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 나는 그를 생각하며 아이가 없는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우물 바닥을 경건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우물 바닥의 심연은 두려움을 주는데 그치지 않고이겠을 삽과 괭이로 판 사람에게 경탄해 마지않는 마음을 갖게 만들었다. 삼십 년 전 아래에서 나를 꾸중하던 마흐무트 우스타의 환영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그가 무언가를 시도한다면 나도 뤼스템처럼 아시아의 권위적인 아버지가 되어 이 무례한 자식보다 앞서 그를 죽일 거야.”
아이쉐는 술에 취한 남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말했다. “물론 그런 짓은 절대 하지 마. 그 자리에서 절대 움직이지 마. 내가 지금 자동차를 타고 곧 갈 테니까.”
생물학적 아들 옌베르와 젬은 우물을 사이에 두고 서 있다.
”삼십 년 전 우물을 파내려 갈 때 아래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별들의 곁으로 신과 천사들의 나라로 올라간다는 생각을 했지요. “
”너에게 있어 아버지가 뭔데? “
” 어머니의 배 속에 잉태된 후 아들의 인생을 끝까지 보호하고 지켜주는 강하고 정 있는 사람이야. 아버지란 그는 세상의 시작이고 중심이지, 아버지가 있다고 믿으면 그를 보지 못해도 기분이 좋고 그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사랑하고 보호해즐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알지, 나는 그런 아버지가 없었어. “
”안타깝지만 나도 그런 아버지가 없었어. “
”하지만 있었더라면 그는 내가 그에게 복종하기를 기대하고 그 힘과 다정함으로 나의 개성을 짓 밞았겠지! “
”내가 아버지에게 복종했더라면 행복했을까?... 어쩌면 좋은 아들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진정한 나는 될 수 없었을 거야 “
.....
”마흐무트 우스카가 내게 모든 것을 설명해 줬어. 당신이 거만해서, 당신이 그보다 더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를 우물 바닥에 방치한 거야. 당신 학교, 대학교, 인생이 그 가난한 사람의 인생보다 훨씬 더 중요했지. “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해. “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
”두려운가? “
“뭐가?”
“우물로 떨어질까 봐?”
...
“나의 아들이라면 성숙한 개인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했을 거야. 우리 인성의 힘은 오로지 우리의 자유가 아니라 역사, 기억에서도 유래하지. 나에게 이 우물은 실제 역사이자 실제 기억이야. 엔베르.”
“왜 돌아가고 싶어 하지? 두려운가?”
그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실수로 우물에 떨어지는 걸 걱정하는 게 아니야. 내가 당신을 붙잡아 아래로 던져버릴까 두려워하는 거지.”
나도 그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 네 아버지에게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데?”
“ 마흐무트 우스타의 복수를 위해, 나를 떠났기 때문에, 결혼한 내 엄마를 꼬드겼기 때문에. 아주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아들의 편지에 답장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 그리고 물론 당신 재산을 물려받기 위해.”
...
“어쨌든 지금 당장 당신 팔을 잡아 우물에 던지면... 그런 다음 내 아버지가 사고로 떨어졌다고 하면 누구도 내 잘못을 증명하지 못한다고.”
“네 말이 옳아.”
“당신한테 화가 났을 때는 당신을 장님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어. 아버지라는 사람에게서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들이 항상 당신을 본다는 것이지.”
“아버지의 관심은 소중한 무언가일 텐데.”
“진짜 아버지라면 그렇겠지. 진짜 아버지는 공정해야 해. 진짜 아버지도 아냐. 진심으로 당신 눈을 멀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 왜 그러는데?”
“난 시인이야, 나의 일은 단어들을 가지고 노는 거지. 하지만 진짜 생각은 단어들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오로지 그림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 지금 당신을 장님으로 만들면, 그때서야 내가 당신이 원한 것 같은 독립된 개인이 될 거야. 왜 그런지 알아? 왜냐하면 그래야만 마침내 나 자신이 된다는 의미고, 내 이야기를 쓰고 나의 전설을 말할 수 있으니까.”
나는 실망과 회한에 사로잡혀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말았다.
“너도 진짜 아들이 아냐, 지나치게 분노하고 지나치게 순종적이야.”
“순종적이라고? 증명해 봐.”
그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때 나는 또 다른 실수를 했다. 재킷 호주머니에서 크룩칼레 권총을 꺼내 농담반 진담반 안전장치를 풀어 보였다.
“아들아. 거기 멈춰 서라. 내가 이걸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지 마. 쏠지도 몰라.”
“당신은 그걸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르잖아.”
그는 이렇게 말하고 크룩칼레 권총에 달려들었다.
우리는 희미한 어둠 속에서 우물 옆 곰팡이 나는 땅에 넘어졌고. 몸싸움을 벌였다. 엎치락뒤치락... 그가 내 몸 위에 올라타서는 권총을 빼앗으려고 내손을 우물 벽면에 치기 시작했다.
제3부 빨강 머리 여인의 독백
나처럼 후천적으로 빨강 머리를 선택한 사람들에게 머리 색깔은 자아를 선택한다는 의미입니다. 일단 머리를 빨간색으로 염색한 후에는 남은 삶 동안 내 선택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이십 대 중반에 나는 아직 옛날이야기와 전설들에서 교훈을 끄집어내는 연극배우가 아니라 현대적인 오 르타오유누 배우이자 분노에 찬 행복한 좌익주의자였습니다.
나보다 열 살 많은 혁명가 연인 아크는 집으로, 아내 곁으로, 아이 한 테로, 약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투르한.. 나를 사랑했던 남자는 아큰처럼 빨리 사랑에 빠지고 빨리 잊어버리는 남자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결혼했지만 그는 내가 다른 남자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투르한은 헌병에게 포위당해 사살당했고..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으나 돌아간다는 것은 패배이자 연극과의 결별을 의미했으므로 투르한의 동생 투르가이와 결혼하여 민중 유랑 극단을 꾸려나갔습니다.
소방차와 오렌지 사이 어디쯤 되는 빨강으로 염색하니 눈에 돋보이고 매력적이었지요.
우물노동자 조수로 온 젬이 나를 알아본 것...
사실 그는 자기 아버지(아큰), 을 아주 많이 닮아있었습니다.
젬은 나에게 빠져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우연이라고 그냥 지나쳐 버린 것들이 사실은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연극에서 배웠습니다. 내 아들뿐 아니라 아들의 아버지가 작가가 되고 싶어 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삼십 년이 지나 이곳 왼괴렌에서 내 아들의 아버지와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내 아들이 자기 아버지처럼 아버지의 부재로 고통을 겪은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연극 무대에서 오랜 세월 동안 우는 연기를 한 후 내가 실제 삶에서 진심으로 우는 여자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내 아들 엔베르는 우물 파는 사람인 마흐무트 우스타의 이야기를 좋아했지요. 마흐무트 우스타가 첫 수맥을 찾은 후 건축붐이 일어 그는 우물 파는 일로 부자가 되었죠
마흐무트 우스타를 우물에서 꺼낼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그 전날 저녁 고등학생 연인 젬과 서투른 사랑을 나누고.. 젬은 내게 왼괴렌에 머무는 이유는 우물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다음날 12시쯤 손에 가방을 들고 다급하게 역으로 달려가는 그를 보자 혼란스러웠죠.
우물로 달려가보니 반쯤 정신을 잃은 마흐무트 우스타가 쇄골이 부러진 채 우물바닥에 쓰러져 있었지요... 우리 극단도 왼괴렌을 떠났고
나는 남자들의 거만함과 연약함, 혈관을 타고 흐르는 자의식을 알아요. 그들이 아들도 아버지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남자들은 영웅이 되고 나에게 남겨진 것은 우는 것뿐이라는 것
아들 옌베르는 나이를 먹을수록 화를 내는 강도가 높아지고 세졌어요. 분노 폭발, 이유 없는 격분. 비판적 태도.. 그 이유를 아버지 없이 자란 데다 아이가 감성적인 탓으로 돌렸지만 사실은 돈이 없어서 일수도 있단 생각을 하고... 성공한 젬의 사진을 신문에서 보고 친자 소송을 내보기도 했죠.
옌베르는 어머니가 결혼한 상태에서 다른 남자와 동침하고 태어난 아이가 자신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우리는 다툼과 화해를 반복했죠.
“다 너 좋으라고 하는 일이다. 아들아!‘
이 말이 가장 큰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머리카락을 빨강으로 염색한 날부터 오늘날까지 내 인생에서 내린 결정들 중 어떤 것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유일한 후회는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말하고 만나도록 해주고 그와 가까워지도록 강요했던 일입니다. 아들은 나더러 몽상가 혹은 돈을 위해 계략을 꾸민다고 비난했죠.,
사실 젬이 죽은 후 신문에서 아들을 이런 어투로 일제히 비난을 했죠. 나의 엔베르는 돈에 눈이 멀어 부친을 살해한 살해범이 되었습니다.
나의 아들 엔베르는 우물 앞에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권총을 빼든 젬(아버지)에 맞서 오로지 자신을 방어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우물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몸싸움을 하고... 의도치 않게 그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신문은 ’쉬흐랍의 성공, 젬의 엄청난 재산, 친아버지를 찾도록 한 서양 의술, 그리고 살인..‘이라는 기사를 수도 없이 재생산했지요.
우리 모자는 이스탄불 역사에서 유산을 받기 위해 아버지를 죽인 사악한 빨강머리 어머니와 자식으로 남았지요. 아들을 보려고 실리브리 교도소에 갈 때마다 죄수중 몇몇이 나를 조롱합니다
아들이 뚜껑 열린 우물과 약간 떨어진 곳에 혼자 앉아있어 지요.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직감했어요. 쉬흐랍의 어머니 타흐미네처럼 울부짖었어요. 세상의 질서는 어머니들의 울음 위에 세워졌지요. 지금 울고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신문들은 불길한 분위기로 우물의 깊이, 바닥에 있는 진흙탕, 아주 오래전 삽과 곡괭이로 그처럼 깊은 우물을 팠다는 것에 대해 기이하다고 썼다. 내 아들이 유산 때문에 아버지를 살해했고 그 배후에 내가 있다고 확신했다.
잠수부가 이틀 만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젬의 시신을 끌어올렸고... 부검결과 우물에 떨어지기 전에 사망했다는 단서를 얻었다.
다음날 1면 의학보고서를 실은 신문들은 ”아버지의 눈을 쐈다. “라고 기사를 실었다
잠수부가 크륵칼레 권총을 건져 올렸고 이 권총이 젬의 것이고, 왼쪽눈을 관통한 총알이 이 권총에서 발사되었음이 입증되면서 아들의 정당방위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우물가에 무기를 가져간 사람은 분노한 아들이 아니라 아들을 두려워한 아버지였다는 사실..
삼십 년 전에 마흐무트 우스타와. 내 아들의 죽은 아버지가 우물을 파기 시작했던 날들은 쉬흐랍의 설립일로 본다고 나는 아이쉐에게 말해주었다.
1986년 하루 간격으로 마흐무트 우스타와 내 아들의 아버지가 노란 천막에 찾아와 뤼스템과 쉬흐랍의 비극을 보고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설명했다. ” 우리 건설 회사가 첫 우물을 팔 때 난 왼괴렌에 있었습니다. 회사이름 쉬흐랍도 당시 무대에서 했던 나의 마지막 독백에서 나왔다는 점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
면회를 갈 때마다 아들의 눈을 들여다보며 진심을 다해 말했습니다.
”나는 사실 마음에서 우러나온 그 마지막 독백을 위해 연극을 했단다. “
성공한 사업가 젬은 아주 오래전 마흐무트 우스타와 함께 최신 장비하나 없이 곡괭이로 파내려 간 우물 앞에 아들 엔베르와 마주 서있었다.
세월을 거슬러 대화를 나눈다.
단 한 번도 아들의 존재를,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두 사람이
마흐무트 우스타가 죽음을 맞았을지도 모를 그 전설적인 우물 앞에서 가슴에 맺힌 말을 쏟아낸다.
아버지의 재산을 탐내서 그의 생물학적 아들 엔배르와 그의 어머니(젬의 하룻밤 연인이자 젬 아버지의 오랜 연인이었던)의 계획적 살인으로 보도된 우물 살인 사건
아들 엔베르의 정당방위로 인정받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젬의 아내이자 성공한 사업가 아이쉐는 싫든 좋든 결과적으로는 건설회사 < 쉬흐랍 >의 후계자가 엔베르 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우물을 파내려 가는 일...
끝없이 아래로....... 수맥이 있으리라는 가능성 하나로.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이 파내려 가야 할 우물이 하나씩 있다.
그 우물은 깊이를 알 수 없고
수맥이 있으리란 보장도 없다.
장비는 곡괭이와 삽과 양동이...
우물 안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내야 하지만 우물밖의 유혹은 강렬하다.
고등학생 젬. 부성결핍에 시달리던 젬에게 우물 파기 전문가 마흐무트 우스타는
함께 작업한 1달의 시간 동안 아버지처럼 다가온다.... 아버지와 같은 그를 우연한 사고로 우물 아래에 던져두고... 비겁하게 이스탄불로 돌아와 대학을 가고 결혼을 하고 성공가도를 달린다.
지적인 여자 아이쉐와 결혼하고 행복하지만 둘 사이 아이는 없다.
젬은 우물을 마주할 때마다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아버지(아큰)의 연인을 오랜 시간이 흘러 아들 젬이 사랑한다.
빨강머리 여인 ...... 빨강 머리여인은 후천적으로 선택한 머리 색이 자신의 인생을 바꿔버린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아버지 재산을 노린 살인. 아버지의 연인을 사랑한 아들, 남편이 죽자 시동생과 결혼한 빨강머리 여인.... 통속적 스토리지만...
어떤 연극 대사 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바로 ’ 울음‘이라는 그녀의 말이 인상적이다.
울음이란 세계 공용어 같은 것이 아닐까?
오르한 파묵은 ’ 부성애‘에 대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서술한다.
생물학적인 아버지는 떠나고 그의 부재를 10달 동안 몸에 담아 키운 어머니가 감당해야 한다. 어머니의 몫과 아버지의 몫이 엄연히 다르다는 걸 은연중 암시한다.
결국 안전장치가 풀린 권총을 서로 뺏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고
그 아들의 손에 의해, 부성 결핍을 뼈저리게 느낀 그 아들에 의해 어두운 우물 바닥으로 떨어진다. 불과 이틀 사이 진흙바닥에 파묻혀 형체를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빨강 머리 여인이 참 야비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항상 자신의 이득대로 움직였다.
자신에게 눈먼 고등학생 젬에게 하룻밤 쾌락을 선사하고
자신은 젬에게서 어쩔 수 없이 헤어진 연인 (아큰)을 떠올리고 있었으니..
아들 옌베르의 허기(부성에 대한)를 채워주기 위해 친자소송을 위한 유전자 검사를 의뢰하지만 젬이 가난한 셀러리맨이었다면 그래도 부성을 찾아주려는 의지가 있었을까..
우물밖의 유혹... 빨강 머리 여인은 스스로 우물 속으로 투신하지 않는다
남편이 죽으면 자신보다 연하인 시동생 투르가이와 살면 되고
자신을 원하는 다른 남자들도 거부하지 않는다
삽과 곡괭이로 고통의 우물을 파내려 가지 않고 무대 위에서 요염한 포즈로 연극을 하고
”벗어 벗어 “를 외치는 관객들에게 적당한 수준의 노출을 하고 그러면서도 ’ 역사. 민중‘ 계몽을 위한 연극을 하고 있다는 자긍심으로 살아간다.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장 이중적인 인물이다.
소방차 색깔과 오렌지 사이의 빨강으로 머리를 염색한 그녀
물론 그녀의 예미한 감각으로 우물에 빠져 죽기 직전의 무흐무드 우스타를 구해내었지만...
친자소송..... 에서 어쩔 수 없는 속물근성을 드러낸다.
나는 우물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인가?
우물밖을 서성이는 사람인가?
아니면 우물 안에 들어간 이를 어떤 형태로든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인가?
마흐무트 우스타는 평생을 우물 안에 자신을 투신한 사람이다
젬은 삽과 곡괭이로 우물을 파내려 가는 인내를 지속하지 못한다. 수맥이 발견된 우물 주변에 고층 빌딩을 세우고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시킨 사람이다.
젬의 아버지 아큰... 약국문을 닫고 홀연히 사라진 그는... 평생 이념과 눈먼 사랑에만 투신한 사람, 또 다른 여자와 살고 있으면서 죽음 앞에서도 아무런 죄책 감 없이 당연하고 당당하다.
빨강 머리 여인....... 어쩌면 이 책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여인.
우물밖에서 유혹하는 사이렌 같은....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모두 자신의 연인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젬의 어머니는 우물 노동자로 떠난 아들을 위해 눈물 흘리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남편에 대한 기대는 이미 포기하고 그녀 인생의 모든 것은 아들 젬이다.
“다 너 좋으라고 하는 일이다. 아들아!"
빨강 머리 여인이 아들 옌베르에게 한 말이다
이 말은 젬의 어머니도 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리라
그리고 어쩌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평생 이 말을 품고 사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잔인하고.... 비열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모성을 담고 있는 말....
부성과 모성........
두 역할은 어느 하나로 대체될 수 없음을 실감하게 한다
젬과 엔베르의 대화
“너에게 있어 아버지가 뭔데?”
“어머니의 배 속에 잉태된 후 아들의 인생을 끝까지 보호하고 지켜 주는 강하고 정 있는 사람이야, 아버지란. 그는 세상의 시작이고 중심이지. 아버지가 있다고 믿으면 그를 보지 못해도 기분이 좋고, 그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사랑하고 보호해 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알지. 나는 그런 아버지가 없었어.”
“안타깝지만 나도 그런 아버지가 없었어.”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있었더라면 그는 내가 그에게 복종하기를 기대하고, 그의 힘과 다정함으로 나의 개성을 짓밟았겠지!”
모든 우여곡절을 거치고 정당방위가 확실하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면 옌베르는 아버지가 파 놓은 우물. '쉬흐랍'이라는 최고의 건축회사를 물려받게 될 것이다.
최종 승자는 옌베르인가?
빨강 머리 여인인가?
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에게 있어 아버지는?
당신에게 있어 어머니는?
그리고 당신에게 있어 우물은?
보이지 않는..... 길이 보이지 않기에 끝없이 수맥을 더듬어야 하는.....
내려다보는 것만으로 로 아찔하고
눈이 멀 것 같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우물은?
대체 무엇이냐고?
그리고 당신은
그 우물 안에 있는 거냐고?
우물 밖에 서 있는 거냐고? /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