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빛 속으로 빛 헤엄을 치며 떠다니는 수많은 인연

세상이 무서워지기 전까진 세상을 무서워하지 마라

빛 헤엄


할머니는 말했다 파도가 두려워지기 전까진 파도를 두려워하지 마라 세상이 무서워지기 전까진 세상을 무서워하지 마라 할머니의 뼛가루를 바다에 뿌린 뒤로 자주 바다로 나가 헤엄을 쳤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추위와 더위를 가리지 않고 할머니가 남긴 말을 이해해 보려고


... 중략.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보다 죽은 자의 청력을 믿었다 하얗던 수영복이 더는 하얗지 않은 게 부끄럽지 않았다 마루 틈에 코를 박고 숨을 쉬면 할머니 몸 냄새가 났다


세상이 무서워지기 전까진 세상을 무서워하지 마라 사랑이 끝장나기 전까진 사랑을 끝장내지 마라 검은 암초에 부딪혀 뺨이 찢겨도 질긴 해초가 종아리를 휘감아도 두렵지가 않았다 세계를 곱게 빻은 빛 가루가 할머니라면 그것이 훨훨 한줌처럼 가볍다면 도무지 세상이 무서워지지 않았다

―정다연(1993∼ )



"파도가 두려워지기 전까진 파도를 두려워하지 마라. 세상이 무서워지기 전까진 세상을 무서워하지 마라."

이런 말을 해주는 누군가가 사라진 지 오래다.

어쩌면 나는 누군가에게 이 말을 해 줄 나이가 되어버렸는지 모르지만

독백처럼 옹알거리는 말 대신

누군가 내 곁에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문처럼.. 마법의 주문처럼... 이 말을 누군가가 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파도가 두려워지기 전까진 파도를 두려워하지 마라 세상이 무서워지기 전까진 세상을 무서워하지 마라

두려워지기 전까진 ~~ 두려워하지 마라..


뼛가루... 사람의 몸이 화장터에서 뜨거운 가루가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 남짓...

덜 바수어진 것들.. 완전히 곱게 분쇄된 것들

유골함의 겉면이 상당히 뜨거웠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였다. 그 뜨거운 것의 정체가....

들여다보는 것조차 두려운... 연회색 뼛가루가 웃고 울고 긴 세월을 다독이며... 열심히 살아가던 한 여인이었다. 호리호리한 여인의 몸이 동그란 단지 안에 들어있었다.


고운 가루가 된 할머니를 바다에 풀어드리고

그 고운 빛을 따라 헤엄치는 손녀는 질긴 해초가 종아리를 감싸고, 검은 암초에 부딪혀 뺨이 찢겨도 두렵지 않다. 세계를 곱게 빻은 빛 가루가 할머니라면 그것이 훨훨 한 줌처럼 가볍다면 도무지 세상이 무서워지지 않았다


할머니가 살던 하나의 세계를 가루로 빻아 또 다른 세계에 섞어 넣으면

세상이 하나도 두렵지 않을까?

시인은 끝내 두렵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파도가 두려워지기 전까진 파도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세상이 무서워지기 전까진 세상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두려워지기 전까지는... 두렵지 않게 살아가야 한다.


세상의 빛 속으로

빛 헤엄을 치며 떠다니는 수많은 인연들...

먼저 가 기다리는 이들의 마음들이..... 보드랍게 뭉쳐져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용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8월이다. 매미가 운다.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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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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