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M.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 > 2003 노벨문학상 수상
Waiting for the Barbarians
J. M. 쿳시 (John Maxwell Coetzee)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J. M. 쿳시의 대표작. 어느 제국의 변경 도시를 통치하는 치안판사인 '나'의 자기 고백적 서사를 통해 제국주의의 모순을 비판하고 제국에 공모하는 개인의 허위를 폭로한다. 변방이 행정, 사법권을 관할하는 최고 책임자인 치안판사가 서술하는 내용이 야만인들을 ‘일종의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제국이 모순과 역설만이 아니라 그 모순과 역설에도 불구하고 제국이 일원으로 봉사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인종과 성, 휴머니즘과 폭력 등의 문제 형상화
어느 제국의 평화로운 변경 도시에 수도의 제3 국 소속 경찰들이 파견되어 국경 너머의 야만인들을 잡아들이고 잔인하게 고문하는 일이 벌어진다. 변경을 통치하는 치안판사인 '나'는 고문 후유증으로 눈이 먼 젊은 야만인 여자에게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끌리고, 그로 인해 야만인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생각지도 못한 치욕을 겪게 된다. 치밀하게 짜인 서사를 통해 식민주의가 자행하는 억압과 국가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정당화되는 타자에 대한 폭력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작품이다.
어째서 모든 거리와 광장이 그렇게도 빨리 텅 비어지는가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도 깊은 생각에 잠겨
다시 집으로 향하는가?
저녁이 되었어도 야만인들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이 변경에서 돌아왔다
그들은 더 이상 야만인들이 없다고 말했다.
야만인들이 없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사람들은 일종의 해결책이었다.
콘스탄틴 카바피의 시 < 야만인을 기다리며> 중에서
콘스탄틴 카바피 Constantine Cavafy의 시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 제목과 모티프를 빌려온 이 소설은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불분명한 무대를 전면에 내세운다.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과 폭력의 사슬에 주목하고 목소리를 내온 쿳시는 이 작품에서 특별히 남아프리카라는 특정 공간을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식민주의로 인해 생겨나는 폭력과 억압의 사슬이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 국한된 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보편적인 일임을 강조한다.
야만인이 없다면 제국은 어찌 될 것인가?
폭력과 억압의 사슬로 드러나는 제국주의의 모순에 대한 고발
거장 J. M. 쿳시의 문학세계가 집약된 역작
J. M. 쿳시는 소설과 에세이, 평론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쳐온 다재다능한 작가다. “현재 생존해 있는 영어권 소설가 중 두말할 필요 없이 가장 유명하며 수상 이력이 많은 작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다양한 문학상과 더불어 영연방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부커상(맨부커상의 전신)을 최초로 두 차례 수상했고, 2003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초기작임에도 불구하고 쿳시 작품세계의 정수가 인상적으로 드러나는 걸작이다.
나이 든 치안판사인 ‘나’의 통솔하에 있는 평화로운 변경 도시에 야만인들의 조짐이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야만인 부족들이 무장을 하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공포가 고조됨에 따라 수도에서 파견된 제3 국 소속 졸 대령이 제국 수호의 최전선인 이 정착지를 시찰한다. ‘나’는 속마음으로는 제3 국의 행보에 매우 비판적인데, 이 모든 소문이 야만인들에 대한 히스테리 때문에 생겨난 가짜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러한 꿈들은 너무 편해서 생겨난다. 내게 야만인들의 군대를 보여준다면야, 나도 믿을 것이다.”
그러나 제3 국은 민심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빨랫줄에 널어놓은 옷이 사라지거나 식료품이 없어지는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야만인들이 몰래 다녀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공포에 떤다. 어느 소녀가 강간을 당하는 일이 생기자, 그녀의 친구들은 야만인의 소행이라고 주장한다. 범인이 갈대밭 속으로 달아나는 모습을 보았는데, 못생긴 얼굴이 야만인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제3 국은 “야만인들이 당신의 불알을 구워서 먹을 거요” 따위의 말로 사람들의 공포를 부채질할 뿐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야만인들을 향한 미움의 근거가 식사 예절이 다르고 눈꺼풀의 형태가 다르다는 사실 말고는 전무하다고 주장하는 치안판사의 말이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
“국가의 수호자들이며 폭동 전문가들이고 진실의 신봉자들이며 취조 전문가들”인 졸 대령의 부대는 야만인들을 진압하러 출정한다. 그들은 성문 밖에서 물고기를 잡아 근근이 살아가는 힘없는 부족을 엉뚱하게 잡아들여 돌아와서는 시민들에게 야만인들은 실재하는 적임을 눈으로 확인시켜 준다. 제3 국은 계속해서 야만인들을 찾는답시고 소탕작전을 벌이지만, 제국에 위협을 주는 진짜 야만인은 단 한 명도 없고 국경 너머 힘없는 민간인들만 고문당하고 짓밟힐 뿐이다. ‘야만인’이란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식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야만인’은 내부 문제의 원인을 상상의 외부인에게 돌리려는 국가의 손쉬운 해결책인 것이다. 쿳시는 이러한 제국의 속성을 시적인 문장으로 명료하게 포착해 낸다.
제국의 속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끝장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제국의 시대를 연장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 제국은 낮에는 적들을 쫓아다닌다. 제국은 교활하고 무자비하다. 제국은 사냥개들을 이곳저곳에 파견한다. 밤이 되면, 제국은 재앙에 대한 상상을 먹고 산다. 도시가 약탈당하고, 사람들이 강간당하고, 죽은 사람의 뼈가 산처럼 쌓이고, 드넓은 땅이 황폐해질지도 모른다는 상상 말이다. 말도 안 되는 미친 상상이지만 전염성이 강하다.
첫 문장
나는 그런 걸 본 적이 없다.
그의 눈앞에, 작은 유리 두 개가 철사로 된 둥근 고리에 매달려 있다. 그는 맹인일까? 만약 맹인이라는 걸 감추기 위해서라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맹인이 아니다. 유리는 검은색이어서 밖에서 보면 불투명하지만, 그는 그걸 통해 볼 수 있다. 그는 그것이 새로운 발명품이라고 말한다....
나는 한가로운 변방에서 은퇴할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책임 있는 시골 치안판사이자 관리이다. 교구 세와 세금을 거둬들이고 공동경작지를 관리하며 주둔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조달해 주고 하급 관리들을 감독하며 교역을 감시하고 1주일에 두 번씩 법정 업무를 주재한다. 그리고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며 먹고 자고 만족해한다. 내가 죽으면 신문에 석 줄 정도의 기사가 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조용한 시대에 조용한 삶을 사는 것 이상의 것을 바란 적이 없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야만인들 사이에 불안한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는 애기들이 수도에서 들려오기 시작한다. 장사꾼들이 야만인들로부터 약탈을 당했다거나 가축의 도난.. 통계청 관리의 행방불명 등... 제국은 틀림없이 일어날 전쟁에 대해 예방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나 자신은 이처럼 불안한 징후에 대해 이무 것도 본 게 없었다. 경험을 통해 한 세에 한 번씩은 꼭 야만인들에 대한 히스테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치안판사의 꿈 1
한쪽 지평선에서 다른 쪽 지평선까지 온 세상이 눈으로 하얗다. 해야 안개가 되어버린 것처럼
꿈속에서 나는 막사 정문을 통과해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은 깃대를 지난다. 광장, 벽들, 나무들, 집들이 모두 작아지더니 세상의 가장자리 너머로 사라져 버린다
미끄러지듯 광장을 가로지르자, 감은 형체들이 흰색에서 분리되어 나타난다.
그들은 눈으로 성을 쌓고 붉은색 기를 꽂으며 놀고 있는 아이들이다. 장갑 낀 손으로는 눈을 가져와 성벽에 바른다.
그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
내가 다가가자 아이들이 양쪽에서 녹아 없어지는 것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 한 아이를 제외하고는... 나이가 많고 어쩌면 이미 아이가 아닌지도 모른다. 두건을 쓴 뒷모습을 내게로 향하고 눈이 쌓인 성문 앞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파고 두드리고 덮는 일을 하고 있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양 옆이 추켜올려진 두건 사이 그녀의 얼굴을 상상해보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 p20)
나의 취미는 도시의 남쪽으로 2마일쯤 가면 모래언덕들이 있는데 모래 속에서 폐허를 발굴하ㅣ는 일이다. 목판들.. 문자를 해독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갖고 모든 목판들을 수집하려 했다.
256개의 목판.. 목판을 거울에 비춰 읽어보기도 했고 겹쳐서 읽어보기도 했다.
보랏빛 황혼이 깃드는 폐허 속에서 아이들이 하라던 대로 땅을 귀에 갖다 댔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들을 수 있다고 한 쿵쿵 거리는 신음소리와 불규칙적으로 두드리는 깊은 북소리를 땅속으로부터 들으려 했다. 폐허를 가로질러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모래들이 나의 볼에 느껴졌다.
나는 어둠을 향해 내 모든 감각을 열어두었다.
... 우울함에 젖어 텅 빈 사막에서 특별한 역사적 비애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헛되고 맥없는 짓
나는 죨대령을 바라보면서 그가 맨 처음 그 일을 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궁금해진다. 펜치로 비틀거나 나사를 돌리고, 혹은 어떤 일을 하든, 그런 일을 처음으로 하면서 자신이 금지된 영역으로 침입해 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이라도 몸을 움츠리기라도 했을까? 또한 그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자신만의 정화의식을 치르고 난 다음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것인지 궁금하다. 손을 아주 조심스럽게 씻는 것일까. 아니면 옷을 모두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가.
p 43 만약 세계사의 어두운 한 장이 지금 당장 종식될 수 있다면 이 추한 사람들이 지구 표면으로부터 지워지고 우리가 더 이상의 불의와 고통이 없는 제국을 운영하기 위해 새 출발을 하겠다고 맹세를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마지막 힘을 다해 그들 모두가 들어가 누울 구덩이를 파게 하고 그들 모두를 묻어버린다면.. 새로운 의도와 결심으로 가득 찬 도시로 귀환하는 비용은 아주 적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방식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제국의 새 사람들은 새 출발과 새 장과 새 페이지를 믿는 사람들이다. 나는 아직도 지난 이야기를 가지고 몸부림치는 사람이다.
P 54 우선 몸을 씻는 의식이 거행된다, 그녀의 발과 다리와 엉덩이를 씻는다... 그녀의 배와 e배와 가슴을 씻는다. 그녀는 묵묵히 잘 견딘다... 침대 위에 누운 그녀의 몸에 아몬드 기름을 바른다. 나는 지금 불빛에 반짝이는 이 작고 단단한 몸속에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들지 않는다.... 어느 날 저녁 그녀의 한쪽 눈 구석에 희끄무레한 주름이 있다는 걸 발견한다. “이게 뭐지?”
“그들이 만졌던 곳이에요.”
“그들이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니?”
그녀는 머리를 젓는다.
p59
그녀의 하루는 판에 박힌 게 되기 시작했다. 방을 나서면 청소를 하고 부엌으로 가서 점심식사준비를 돕는다. 오후시간은 주로 그녀만의 시간이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그릇과 냄비를 닦고 바닥을 청소하고 불을 끄는 일을 끝내면 열여섯 계단을 올라와 나에게 온다. 그녀는 옷을 벗고 누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나의 정성을 기다린다. 어쩌면 나는 그녀의 곁에 앉아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며 결코 오지 않을 피의 활력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녀는 잠 속에서 더 팽팽해진다.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을 입은 눈과 발조차도 다시 한번 온전해지려고 한다.
p 60
그녀가 한 때 어린애였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처럼, 내가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서 인생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무렵, 좋아하는 양을 쫓아다니며 달음질치며 놀던 머리를 귀엽게 땋은 작은 소녀였다는 것을.... 아무리 노력해 봐도 내 머리에 떠오르는 그녀의 첫 모습은 무릎을 꿇고 구걸하는 소녀의 모습일 뿐이다. “
내 마음은 그녀를 향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관복을 입고 있든. 발가벗은 채로 있든, 내 가슴을 열어 그녀에게 보여주든 나는 똑같은 사람일 뿐이다
P66 치안판사의 꿈 2
나는 밤에 똑같은 꿈을 또 꾼다. 눈으로 된 성 주변에서 놀고 있는 한 무리의 아이들을 향하여 끝없는 눈평원을 걷는다. 내가 다가가자 아이들은 사라지고 한 애만 남는다. 두건을 쓰고 나에게 등을 보이고.. 나는 성의 측면에 계속 눈을 바르고 있는 그 아이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두건 밑을 들여다본다. 텅 비고 형체 없는 얼굴. 태아 혹은 작은 새끼고래의 얼굴이다. 아니 그건 얼굴이 아니라 피부밑에서 부풀어 오른 몸의 다른 부분이다. 그건 하얗다. 그건 눈 그 자체이다. 멍한 손가락으로 동전 하나를 내민다.
P. 66 올해에는 야만인 손님들이 찾아오지 않았다. 예전에는 겨울이 되면 유목민들이 집단으로 찾아와 담벼락 바깥에 천막을 치고 양모, 동물 가죽, 펠트, 가죽제품 등을 면직물, 차, 설탕, 콩, 밀가루 등과 맞바꾸곤 했다. 우리는 그들의 가죽제품, 특히 그들이 만든 질긴 구두를 귀하게 여겼다. 나는 과거에는 그 거래를 장려했지만 돈으로 값을 치르는 일은 금지시켰다. 또한 그들이 술집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독한 술의 노예가 된 거지들과 부랑자들이 도시 주변에 기생충처럼 정착하는걸 나는 무엇보다도 원치 않는다. 예전에 이들이 상점 주인의 속임수에 넘어가 자신들의 물건을 시시한 장신구와 교환하거나 술에 취해 도랑에 드러눕고, 결국 그들이 게으르고 부도덕하며 더럽고 어리석다는 주민들의 편견을 굳히는 모습을 보는 게 괴로웠다. 문명이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다면, 나는 문명에 반대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러한 입장에서 행정 업무를 수행했다. (지금은 야만인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하지만 올해에는 변경의 모든 지역에 장막이 쳐져 있다. 우리는 성벽에서 황무지를 노려본다. 우리보다 더 날카로운 눈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교역은 끝났다.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회생이 따르든 모든 수단을 동원하라는 지침이 수도에서 내려온 이래로 우리는 기습과 경계의 시대로 되돌아가 있다. 칼날을 세우고 경계하며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포크였어요. 두 개의 날이 있는 포크. 끝에는 작은 혹이 달려 뭉툭했어요. 석탄불에 빨갛게 달군다음 그걸로 사람들의 몸을 지졌어요.... 그들은 제 몸을 지지지는 않았어요. 내 눈을 지지겠다고 했지만 그것을 내 얼굴에 아주 가까이 대고 나로 하여금 그것을 바라보게 했어요. 눈꺼풀이 감기지 않게 잡고서... 그게 전부였어요. 그 후로 제대로 앞을 볼 수 없었어요. ”
P. 74 이 여자한테는 몸속이 존재하지 않고, 내가 이리저리 들어갈 곳을 찾아 헤매는 표면만이 있는 것 같다. 바로 이게 그녀를 고문했던 자들이 비밀을, 그들이 그게 무어라 생각했든 간에, 추궁하며 느꼈던 걸까? 처음으로 나는 그들에게 메마른 동정심을 느낀다. 몸을 지지고 찢고 베어서 다른 사람의 은밀한 몸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건... 어느 부분보다 우선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때때로 성기는 나와 전적으로 다른 존재인 것 같았다. 나한테 기생해 살면서 제 스스로의 욕망에 따라 커졌다가 작아지고,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이빨로 내 살에 달라붙어 사는 우둔한 동물인 것 같았다. 나는 물었다. 내가 왜 너를 이 여자 저 여자에게 데리고 다녀야 하지? 네가 다리 없이 태어나서 그러냐? 네가 나 대신 개나 고양이한테 뿌리를 박고 산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 변경에서 3 년간 복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병사들을 대체하여 신병부대가 도착했다
젊은 장교가 인솔하고 있다.
“ 사령부 소문에 따르면 봄이 되면 야만인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해 산악지역으로 몰아붙일 거라고 합니다.”
“그건 소문에 지나지 않소. 우리가 야만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유목민들이오. 그들은 저지대와 고지대를 오가며 사는 사람들이오 그들이 사는 방식이오 결코 산악지대에만 갇혀 있지는 않을 거요.”
그는 나를 수년 동안 이렇게 침체된 곳에서 게으른 토착민들이 방식에 맞춰 살다 보니 구태의연한 생각에 젖어있고 제국이 안보를 임시적으로 불안정한 평화와 맞바꾸려 하는 위태로운 생각을 하는 한심한 민간 관리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지난 20년 동안 치안판사로 소 싸워야 했던 문제는 가장 저질적인 마부나 농사꾼들이 야만인을 경멸하고 모욕한다는 것이오.
그 경멸이라는 것이 식사예절이 다르고 눈꺼풀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 말고는 구체적 근거가 없는 것이라면 당신은 그것의 뿌리를 어떻게 뽑을 수 있겠소?... 야만인들은 아직도 우리를 이곳에 일시적으로 체류하는 방문객으로 생각하고 있소. 그들은 자신들이 우리보다 더 오래 남아있을 것이라고 말이오”
. p90
나는 야만적인 방식이 승리하리라는 걸 정말로 기대하고 있는가? 만약 우리가 사라지면 야만인들은 우리의 잔해를 발굴하며 그들의 오후 시간을 보낼 것인가. 우리들의 연애편지에 쓰인 글자를 해독하는데 시간과 정신을 쏟을 것인가?
* 치안판사의 꿈 3
아이들이 다시 눈 속에서 놀고 있다. 나에게 등을 돌린 채 두건을 쓰고 있는 그 여자아이는 그들의 한가운데에 있다. 순간 나는 그녀를 향해 나아가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녀는 내리고 있는 눈의 장막 뒤로 사라져 버린다. 발이 너무 깊이 빠져 발을 돌어 올리기가 힘들다. 한 발자국을 떼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최악의 눈이다..... 소녀는 눈으로 된 요새를 만드는 중이다.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이가 빛나고 새까만 눈으로 사람을 쳐다보는 아이의 모습이다.
“그래 이게 본래의 모습이었구나.”
차갑고 굳은 상태로 꿈에서 깬다.
3
철새들이 온 것은 봄이 오는 걸 알리는 최초의 신호다. 3월 3일에 출발한다.. 사흘째는 늪지의 가장자리가 북쪽으로 휘어진다... 여드렛날 휴식을 취한다. 말들이 비참한 상태에 있다. 바람이 눈 얼음 비 모래자갈을 퍼붓는다. 뼛속까지 아리다. 우리는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이 상황을 견뎌내려고 밀착시키고 있다. 열흘째 되는 날, 하늘은 맑고 바람도 부드럽다.
P. 108 나는 생각한다. ‘혹은 어쩌면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틀린 말인지도 모른다.’ 내 입술이 움직인다. 소리 없이 말을 만들고 다시 만든다. ‘혹은 어쩌면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은 오직 살아내야 하는 건지 모른다.’
저 사람들에게 네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해봐. 난 최대한 먼 곳까지 널 데리고 왔다. 이제 네가 나와 함께 도시로 돌아가주면 좋겠다. 물론 그건 너의 선택이지만. “
”내 말 이해하지?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왜요?”
이 말이 그녀의 입술에서 너무나 부드럽게 밖으로 나온다. 그 말이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
자제력을 잃은 뻔한다. 그녀가 떠나려 한다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쳐다보고. 내 마음의 움직임을 들여다보며 그녀가 누구인지 이해해 보려고 노력한다... 이제 마지막이다. 이제부터는 의심스러운 욕망에 따라 기억이 목록에서 그녀를 끄집어내 상상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그녀의 볼을 만지고 손을 잡는다. 이 황량한 언덕 위에서 밤이면 밤마다 나를 그녀의 몸으로 끌고 마비 상태로 몰고 갔던 에로티즘의 흔적을 나 자신에게서 찾아낼 수 없다. 그녀에게선 아무 반응이 없다. 입은 크고, 앞머리는 눈썹 위에서 가지런히 잘려있고... 이방인. 낯선 곳에서 왔다가 행복하지 못한 방문을 끝내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방문객..
“안녕”
내가 말한다.
“안녕”
그녀가 말한다. 그녀의 목소리도 내 목소리만큼이나 생기가 없다.
P. 125~126 나는 소금 지대를 터벅터벅 걸으며, 내가 그처럼 먼 곳에서 온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게 놀랍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 내가 원하는 건 낯익은 곳에서 편안하게 살다가 내 침대에서 죽어, 옛 친구들의 조문을 받으며 무덤으로 가는 것뿐이리라.
희미한 트럼펫 소리가 들린다. 기병들이다. 그들은 우리를 에워싼다. 야만인에 대한 예정된 작전이 진행 중이라는 걸 안다
“당신은 적과 내통을 했소. 어째서 당신은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직무를 이탈했소”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제국 수호자들과의 연합은 깨졌다. 나는 자유인이다.
벽 뒤에서 곡괭이가 쿵쿵거리는 소리. 인부들의 고함소리.. 막사를 확장시켜 감방을 만들고 있다.
“문명의 검은 꽃이 필 때가 된 거로군.”
하루 종일 텅 빈 벽을 응시한다. 그 벽에 스며있는 고통과 타락의 흔적이 나타날지 몰라서다. 눈을 감고 청각을 집중한다. 여기에서 고통을 당했던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벽에서 벽으로 울리는 소리를 잡아내기 위해서다.
언젠가 이 벽들이 팽팽해지고 불안한 메아리에 마침내 날개가 달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한다... 이 벽들 어딘가에 갇혀있는 그들의 영혼을 불러내려고 노력한다.
....
P 139
되돌릴 수 없는 그 여자의 모습에 달려들어 그 주변을 빙빙 돌면서 의미의 거울을 하나씩 던진다. 희미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며 지팡이애 몸을 기대고 있다. 그녀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사람을 보호해 주는 앨버트로스의 듬직한 날개일까? 아니면 먹잇감에 숨이 붙어있는 한, 무서워서 공격을 하지 못하는 겁쟁이 까마귀의 검은 모습일까?
p 139
야만인들이 강둑을 은폐물로 사용하니까 그들은 풀에 불을 질렀다. 불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낮은 계곡 전체로 번졌다. 원정대들은 땅에 아무것도 없게 되면 바람이 땅을 파먹기 시작하고 결국 그곳이 사막화될 거라는 건 개의치 않는다, 땅을 유린하고 야만인들을 섬멸할 작전을 준비하고 있다
P. 142 나는 처음 감방에 들어와 문이 닫히고 자물쇠가 채워질 때 웃었다. 일상적인 삶의 고독에서 감방의 고독으로 옮겨가는 건 큰 고통이 아닌 듯했다. 생각과 기억을 갖고 들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자유라는 게 얼마나 기본적인 것인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나에게 어떤 자유가 남았는가? 먹거나 배고플 자유, 침묵을 지키거나 혼자 지껄일 자유, 혹은 문을 두드리거나 비명을 지를 자유이리라. 그들이 나를 여기에 감금했을 때 내가 불의, 경미한 불의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피와 뼈와 고기가 뭉쳐진 불행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녀를 잊어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다. 그녀의 공허한 눈에는 언제나 엷은 안개가 퍼져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걸 압도하는 공허함.
어둠 속, 내가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기억은 기름이 묻은 내 손이 그녀의 무릎과 종아리와 발목 위로 미끄러지던 기억이다. 나는 그녀를 잊어가고 있다, 의도적으로. 막사의 정문 부근에서 가던 길을 멈추고 그녀를 점찍은 순간부터 내가 그녀를 필요로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지속적으로 그녀를 망각 속에 묻으려 하고 있다
P. 172 지금 이 순간 군중으로부터 큰 걸음으로 멀어지는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해진 건, 막 일어나려고 하는 잔혹행위에 내가 오염되지 않아야 하며, 또한 가해자들의 무기력한 증오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죄수들을 구할 수 없다. 그러니 나 자신이라도 구하는 길을 택하자. 언젠가 누군가가 이 일에 대해 얘기하게 된다면, 그리고 먼 훗날 누군가가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면, 제국의 변방 오지에도 마음속에서는 야만인이 아니었던 자가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다는 얘기를 할 수 있도록 하자.
P. 190 나를 고문한 사람들은 고통의 정도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오직 육체 속에서, 육체로서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내게 보여주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온전하고 정상적인 상태에 있을 때에만 정의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머리를 쥐어잡히고 파이프가 목구멍 속으로 쑤셔 넣어지고, 그 속으로 소금물이 부어져 기침을 하고 구역질을 하고 몸부림을 치고 토하는 상황이 되면, 언제 그랬느냐 싶을 정도로 빠르게 정의에 관한 생각들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육체로서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만델준위의 말 때문에 나의 회상은 끊기고 만다. 나는 말다툼을 하며 이 자리를 끝내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응수한다. ˝그건 소문일 뿐이오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요. 우리가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유목민이 그들은 매년 저지대와 고지대를 오가며 살고, 그게 그들이 사는 방식이죠. 그들은 결코 산악지방에만 갇혀 있지는 않을 거요.
그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오늘 밤 처음으로 나는 장벽이 내려오는 걸 느낀다. 군인과 일반인 사이의 장벽. ˝솔직히 말씀드리면 바로 그게 전쟁입니다. 우리가 강요하지 않으면 선택을 내리지 않을 사람들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거죠.˝ 그는 사관학교를 나온 젊은이답게 오만하고 솔직한 눈초리로 나를 살핀다. 나는 그가 지금쯤 멀리 퍼졌을 나에 관한 소문을 들었으리라 확신한다. 내가 제3 국 소속의 경찰에게 비협조적이었다는 얘기 말이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것 같다.
그는 나를 수년 동안 이렇게 침체된 곳에서 게으른 토착민들의 방식에 맞춰 살다 보니 구태의연한 생각에 젖어 있고, 제국의 안보를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평화와 맞바꾸려는 위태로운 생각에 빠진 하찮은 민간인관리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P. 94 그녀는 아무런 불평 없이 새로운 생활 방식에 적응한다. 나는 그녀가 야만인의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순종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야만인의 교육에 대해서 아는 게 뭐지? 내가 순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관심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거지에 아버지도 없는 그녀에게, 거처할 곳이 있고 배를 채울 음식만 있다면 내가 혼자 자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P. 139 나는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놀라지 않는다. 암시하거나 뉘앙스를 풍기는 말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그리고 그런 식으로 질문을 함으로써 특정한 답변을 유도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에 맞는 한 법을 이용할 것이다. 그런 다음 다른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그게 제3 국이 운영되는 방식이다. 법의 테두리 내에서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법적 절차라는 건 그저 많은 수단들 중 하나일 뿐이다.
광장에서 왁자지껄한 소리 들린다
나팔에서 나오는 놋쇠 소리가 그 위로 희미하게 들린다
“야만인들이다!”
나아갈 길을 만들기 위해 무거운 막대기를 휘두르는 남자가 깃발을 든 사람의 말을 끌고 있다
기병이 밧줄을 끌고 가고... 밧줄 끝에는 목과 목이 줄줄이 묶인 야만인들이 있다. 이상한 모습으로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왜 그렇게 엉거주춤한 자세로 따라가는지 의아해한다. 그러나 나는 쇠가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알아차린다. 철사줄이 모든 사람의 손바닥과 뺨에 꿰어져 있다.
‘그렇게 하면 야만인들은 양처럼 순해진답니다. 아주 조용히 있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답니다.’
감방으로 돌아가야 함을 알면서도 몸은 자꾸 군중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간다. 막사 정문을 지난 감옥의 뜰로 가서 빈 양동이에 물을 가득 채운다. 맨 앞줄로 간다.
군인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이는 죨대경령이다.
대령이 발가벗은 포로의 등 위에 숯으로 ‘적 적 적 적이라 쓴다. 그런 다음 채찍질이 시작된다. 초록색 등나무 회초리.. 붉은 채찍 자국. 검은 숯과 황토색 먼지가 땀과 피에 섞여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등에 있는 글씨가 사라질 때까지 때릴 모양이다.,
엄마 옷을 움켜쥐고 맨 앞줄에 서 있는 작은 소녀의 얼굴을 본다. 아이는 공포에 떨면서도 호기심 있는 표정으로 정신없이 바라본다.
증오나 피에 굶주린 욕망이 아니라 너무나 강렬한 호기심.. 호기심인 너무 강렬해서 그들의 몸이 그것에 의해 고갈되고 눈만 살아있는 것 같다. 새롭고도 탐욕스러운 욕망의 기관인 눈.’
채찍질이 끝나고 죨대령은 4파운드짜리 망치를 든다.
그의 눈길과 나의 눈길이 만난다.
“안 돼!”
“안 돼!”
망치는 팔짱을 낀 대령의 팔에 걸쳐있다
“짐승에게도 망치는 사용 해서는 안돼!
“우리는 위대한 생명의 기적이야. 기적적인 몸조차도 어떤 것에 맞으면 회복이 불가능할 수 있단 말이야.”
나는 몽둥이가 내려오는 소리를 듣고 몸을 돌린다. 몽둥이가 얼굴 전체에 떨어진다.
순간적으로 내리 닥친 어둠, 피를 삼킨다 뿌연 세상이 눈물 속에 헤엄치며 다시 나타난다.
*치안판사의 꿈 4
그녀는 자기가 만든 성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짙은 청색 옷을 입은 그녀가 성의 안쪽을 파내고 있다. 그녀가 나를 의식하고 돌아선다. 그것은 성이 아니라 진흙오븐이다. 굴뚝에서 연기가 솟아오른다. 금색으로 수를 놓은 둥근모 자를 쓰고 두툼하게 땋은 머리가 어깨 위로 늘어뜨려있다.‘나는 네가 이처럼 예쁜 모습을 하고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녀가 미소 짓는다. 그녀가 내민 것이 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 고마움의 물결이 내 몸속에 솟는다. 그녀를 껴안아 주려다 뺨 위의 상처를 건드려 정신이 든다.... 그 꿈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다.
죨대령은 내 사무실 책상 뒤에 앉아 있다. 목재상자 속의 3백 장의 백색 포플러나뭇조각
... 공기에는 한숨소리와 비명소리 가득하다오. 당신이 그것들에 마음을 주고 귀 기울이면 자저승에서 영원히 메아리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오. 죽은 자들의 절규..
“ 당신에겐 새로운 야망이 있는 것 같군. 원칙을 위하여 개인의 자유를 희생할 용의가 있는.. 마지막 남은 의로운 사람으로 이름을 날리고 싶어 하는 것 같소. 당신은 역사에 순교자로 기록되기를 원하는 것 같군. 하지만 누가 기록해 줄까? 잊힐 거야."
"네가 데리고 온 저 한심스러운 포로들. 그들이 내가 두려워해야 하는 적이란 말인가? 대령 적은 바로 너야!. 네 놈이 적이란 말이다. 네놈이 전쟁을 했고. 네놈이 그들에게 필요로 하는 순교자들을 만들어줬어. 그것이 지금 시작된 게 아니고 네놈이 더럽고 야만스러운 짓을 처음 시작했던 1년 전부터 이미 시작된 거야. 역사가 내 말을 증명해 줄 것이다.”
“우리의 면담은 끝났다. 저 인간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
일어서서 나가버린다.
하나의 육체 속에서 하나의 육체로만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온전하고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정의를 생각하다가 파이프가 목구멍으로 쑤셔 넣어지고 소금물이 부어져 구역질을 하고 도리깨질을 하는 상황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정의에 관한 생각들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육체.
.... “치안판사. 이제 때가 됐다.”
새로운 하얀색 대마 로프의 한쪽 끝이 위로 던져진다. 나무를 타고 있던 아이들 중 하나가 그걸 잡고 가지에 건 다음 다시 내려준다.
“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아무 말이나 해. 기회를 주지.”
그는 내 영혼을 상대하고 있다. 매일매일 육체를 접어 옆으로 치워 넣고 내 영혼을 빛에 노출시킨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할 말이 없소. 당신이 이런 일을 헌신적으로 하는 이유를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해주시오. 이제는 당신 손에 죽으려는 나라는 사람한테 당신이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지?”
소금자루를 내 목에 씌우고 끈으로 묶는다. 내 발이 사다리의 맨 아래 계단을 밟는다.
열 개의 계단을 오른다.
“야만인들과 나 사이에 군사적 문제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네. 나는 그 여자를 가족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갔을 뿐.”
“ 그게 다인가?”
우스꽝스럽게 여자 옷을 입고 자루를 뒤집어쓴 나의 입에서 역겹게도 비겁한 말이 나온다.
“나는 살고 싶네. 다른 사람들처럼 말이네. 정말 너무너무 살고 싶네, 어떻게든 말이지.”
팽팽한 로프에 목이 졸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피가 귀에서 망치질을 한다.
나는 그 노인 앞에 서 있다. 구식 총이 아직도 그가 탄 말의 두 귀 사이에 있다. 총구가 나를 겨누고 있지는 않다. 그의 입술을 바라본다. 음절 하나하나까지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새가 날아가버리듯 내 기억 속에서 날아가버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여자는 그의 뒤에 있는 말을 타고 있다. 머리를 숙인 그녀도 그가 말하기를 기다린다.
....
땅에 닿는 건 내 발이다. 나는 숨을 쉰다. 자루가 벗겨지고 태양이 눈을 부시게 한다. 모든 것이 빙빙 돈다.
두 번째 원정군이 야만인들을 계곡에서 내쫓고 그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결코 잊지 못할 교훈을 가르쳐주기 위해 깃발을 휘날리며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출정한 후로 오랜 시일이 흘렀다.
걱정스러운 소문만 무성하다.
“당신은 죄수신분이 아니야. 나가는 건 자유야. 우리에겐 당신에 관한 기록이 없어
“1분만 할애해 줄 수 있나?”
“나는 이미 한 번 죽은 사람이네... 일이 끝나고 나서 음식을 먹는 게 쉬운 일인가? 손부터 씻는가... 손을 씻는 것만으로는 안될 것 같아. 성직자의 정화의식이 필요할 거 같은데.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 나는 자네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고 싶네. 나는 자네가 날마다 어떻게 숨을 쉬고 먹고 사는지 상상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네.... 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네. 만일 내가 저 사람이라면 내 손이 너무 더럽게 느껴져...”
원정군이 출발한 지 3개월이 지났지만 아무 소식이 없다. 원정대가 사막으로 유인당해 전멸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사람들이 떠난다. ’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라는 전제를 달고 자물쇠를 채우지만 다음날 군인들이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약탈을 한다. 군인들이 도시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는다. 제국에 대한 집단 충성을 맹세하고 우리는 여기에 남아있을 것이다가 충신들의 구호가 되었다.
만델은 수비대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버린 듯하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물속의 고기들이나 허공의 새들이나
아이들과 같은 시간 개념 속에 사는 걸 불가능하게 만드는가? 그건 제국의 잘못이다.
제국은 역사의 시간을 만들어냈다. 제국은 부드럽게 반복되는 순환적인 계절의 시간이 아니라 흥망성쇠와 시작과 끝 그리고 파국이라는 들쭉날쭉한 시간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제국은 역사 속에 존재하고, 역사에 반해 음모를 꾸미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 제국의 속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끝장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제국의 시대를 연장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
제국은 낮에는 적들을 쫓아다닌다. 제국 은 교활하고 무자비하다. 제국은 사냥개들을 이곳저곳에 파견한다. 밤이 되면, 제국은 재앙에 대한 상상을 먹고 산다. 도시가 약탈당하고, 사람들이 강간당하고, 죽은 사람의 뼈가 산처럼 쌓이고, 드넓은 땅이 황폐해질지도 모른다는 상상 말이다. 말도 안 되는 미친 상상이지만 전염성이 강하다.
부드러운 호수바닥 진흙을 밟으며 물살을 가르고 있는 나도, 충성스러운 졸 대령보다 그러한 생각에 덜 감염된 건 아니다. 끝없는 사막에서 적을 쫓아다니고, 칼집에서 칼을 꺼내 야만인들을 연거푸 베어 쓰러뜨리다가, 동료들이 박수를 치고 공중에 축포를 쏘아대는 가운데 ‘여름별궁‘으로 통하는 청동 문을 기어올라, 영원한 지배를 상징하는 뒷발로 선 호랑이가 받치고 있는 지구의를 쓰러뜨릴 운명을 타고난 야만인(당사자가 아니라면 그의 아들 혹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의 손자)을 마침내 찾아내 죽이는 상상을 하는 졸 대령보다 내 감염의 정도가 덜한 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이 부당하게 고통을 받으면, 그 고통을 목격한 사람들은 수치심 때문에 괴로워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나 자신을 위로해 봐도 마음이 편치 않다.
그녀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분명하게 본 사람의 얼굴은 달궈진 인두 뒤에 서 있던 그 남자의 얼굴이 아니었던가? 나는 지금도 수치심에 몸이 오그라들지만, 내가 머리를 그녀의 다리에 대고 부러진 발목에 입을 맞추고 애무할 때, 그녀에게 내 흔적을 깊숙이 새기지 못하는 것을 진짜 속마음으로는 아쉬워하지는 않았는지 자문해봐야 한다. 부족 사람들이 그녀에게 아무리 친절하게 대해준다고 해도, 그녀는 정상적인 방식으로 구애를 받지 못하고 결혼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방인의 소유물이었다는 낙인이 평생 찍힐 것이다. 아무도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애처로운 감각적 동정심에서 그녀에게 접근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녀는 자신을 그렇게 대하는 나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녀가 그렇게도 자주 잠 속으로 빠져들었던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녀가 내 침대에서보다 채소의 껍질을 벗기면서 더 행복해했던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내가 막사 정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녀 앞에 섰을 때, 그녀는 이미 자신을 조여 오는 허위의 독기를 느낀 게 틀림없다. 욕망으로 가장한 질투심과 동정심과 잔인성의 허위 말이다. 충동이 아니라 충동을 애써 거부하는 성행위에서도 허위를 느꼈을 것이다! 그녀의 냉정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녀는 처음부터 내가 허위적인 유혹자라는 걸 알았다.
P. 223 만약 내가 그녀를 이해했다면, 만약 내가 그녀를 믿었다면, 만약 내가 그녀를 믿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면, 나는 혼란스럽고도 쓸데없는 속죄의 몸짓을 하면서 일 년을 보내지 않아도 됐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냉혹하고 엄격한 대령과 정반대인 관대하고 쾌락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편안한 시절에 제국이 스스로에게 얘기하는 거짓말이고, 대령은 거친 바람이 불며 세상이 험악해질 때 제국이 얘기하는 진실이다. 제국의 통치술의 양면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우물쭈물하면서 이름 없는 이 지역을 관망만 하고 있었다. 먼지 많은 여름,
짐마차에 실을 정도로 많은 살구, 긴 낮잠 시간, 게으르기 짝이 없는 수비대, 해마다 호수의 잔잔한 표면에 내려앉았다가 다시 날아가는 물새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참자 곧 저 사람은 떠날 것이다. 조만간 다시 조용해질 것이다. 낮잠 시간도 더 길어질 것이고, 우리의 칼날에도 녹이 더 슬 것이다. 그리고 야간순찰자는 탑에서 살그머니 내려와 아내와 같이 밤을 보낼 것이고, 회반죽은 떨어져 내리고 도마뱀은 벽돌 사이에 둥지를 틀게 될 것이며, 부엉이들은 종루에서 날아오를 것이다. 제국의 지도에 변방이라고 표시된 선은 희미하고 모호해져 결국 우리는 운 좋게 잊힐 것이다.
나는 이렇게 스스로를 유혹하면서 방향을 잘못 잡고 말았던 것이다. 길을 걷다가 진짜처럼 보여서 들어가 보면 미로의 한복판으로 들어가게 되는 잘못된 방향 선회처럼 말이다.
치안판사의 꿈 5
눈 덮인 광장에 있는 그녀를 향해 나아간다. 바람이 외투를 낚아채자 속도가 빨라지면서 내 발이 땅 위를 미끄러져 간다. 나는 광장의 중앙에 있는 그녀를 내리 덮친다. 그녀가 나를 본다/ 빛이 나고 건강하고 놀라지도 않은 채 미소 짓는 아이의 얼굴이다.
그녀의 머리가 내 배를 스친다 그리고 바람에 휩쓸려 가버린다. 나방의 날갯짓만큼이나 미미한 충돌. ’ 결국 내가 걱정할 필요가 없었구나 ‘ 나는 뒤를 돌아보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하얀 눈에 묻혀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다
1마일도 떨었어지지 않은 곳에 말을 탄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시내 쪽을 향해 멍한 눈길을 던진다. 머리 위로 부대 깃발이 휘날린다. 안장에 똑바로 앉아있도록 단단한 나무에 묶여 있다. 등뼈는 막대기로 반듯하게 받쳐져 있고 그의 팔은 가로대에 묶여있다. 턱은 닫혀있고 살은 부풀어 있다. 파리들이 윙윙거린다.
시체를 실은 말의 질질 끌리는 고삐를 잡아들고 야만인들에게서 온 메시지를 갖고 메시지와 다를 바 없는 시체를 이끌고 문들을 통과해 구경꾼들을 지나쳐 막사의 뜰로 가서 무언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시체를 묶은 걸 잘라내고 매장을 하게 하는 일은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인 것처럼 보인다. 아무도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재앙에 대한 모든 징조가 실제로 확인된 셈이다.
처음으로 진짜 공포가 엄습한다.
만델은 광장에서 발표문을 읽고 있다. 제국 사령부의 이름으로.. 일시적인 조치.. 새로운 공세를 취하게 될 봄에 다시 오기를 희망한다..
그의 부하들이 징발한 것을 들고 온다.... 조직적인 배반 행위... 서 있는 사람들의 무기력한 분노가 감지된다.
아파트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깬다.
졸 대령의 마차가 안으로 들어온다
유리창을 통해서 보니 침침한 안쪽 구석에서 얼굴을 돌리고 앉아 있다.
나는 유리창을 때려 부수고 그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저 인간을 들쭉날쭉한 유리 구멍 밖으로 질질 끌어내면서 깨진 유리에 살이 찢어지게 만들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쳐 녹초가 될 때까지 두들겨 패고 싶은 충동이 인다.
졸 대령이 천천히 유리창 쪽으로 다가와 나를 본다. 그의 훤칠하고 창백한 관자놀이를 응시한다. 내가 혐오하는 잔혹 행위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부드러운 젖가슴과 그가 처음으로 연을 날렸을 때 손에 느껴지던 감촉애 대한 기억들이 그 안에 저장되어 있으리라.
검은색 안경은 사라지고 없다. 저 남자도 손을 뻗어 손톱으로 내 몸을 할퀴고 나무 가시로 내 눈을 멀게 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고 있을까?
나는 그에게 들려줄 말이 있다. 오랫동안 생각해 온 것이다
나는 말을 하며 그가 그 말을 내 입술에서 읽는 모습을 지켜본다
“우리 안에 범죄적인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걸 자신한테 가해야 하는 법이다.”
“다른 사람들한테 그럴게 아니란 말이야.”
그는 나의 입술을 바라본다. 그의 얇은 입술이 그 말을 따라 하며 움직인다. 아니 어쩌면 조롱하는 말을 하는 것인지도..
치안판사의 꿈 5
꿈속에서 구덩이에 들어가 있다. 축축하고 어둡다. 나는 밑을 더듬는다. 뼈를 찾으려는 것이다. 시커멓게 썩은 황마 자루의 끝이 내 손에 들려 나온다. 손가락 사이에서 바스러진다. 손을 흙 속에 다시 집어넣는다. 구부러지고 녹슨 포크각 나온다. 죽은 새도 나온다. 눈구멍은 비어있다. 내가 그것을 놓아버리자 소리 없이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태양이 구릿빛으로 변한다. 배들은 모두 호수에서 치워졌고 새들은 노래하는 걸 멈췄다. 절대적인 침묵이 있다.
사막의 폐허에 한 때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우리도 정착지에 대한 기록을 작성해서 벽 밑에 매장하여 후대에 물려주는 게 지당한 일처럼 보인다.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이 제국의 국경 지방에 관한 연대기도 아니고 야만인들을 기다리던 국경지방 사람들이 마지막해를 어떻게 살았는지에 관한 기록도 아니란 걸 느낀다
’이 오아시스를 찾아오는 누구도 이곳 생활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계절과 수확과 이동하는 철새들에 맞춰 살았다. 우리와 별들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계속 살 수 있는 길을 알 수만 있었다면 우리는 어떠한 양보라도 했을 것이다. 이곳은 지상낙원이었다. “
내가 그렇게 오랜 시간 할애했던 포플러 나뭇조각들이 내가 쓴 글처럼 솔직하지 못하고 미심쩍고 괘씸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면 실망스러울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역사의 바깥에서 살고 싶었다, 나는 제국이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아니, 행방불명된 백성들에게조차 강요하는 역사의 바깥에 살고 싶었다. 나는 야만인들에게 제국의 역사를 강요하는 걸 원치 않았다. 이것이 수칫치스러워할 이유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나는 생각한다.
‘무엇인가가 내 얼굴을 응시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내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바람이 멈췄다. 첫눈이다. 발꿈치에서 뽀드득 보드득 야릇한 소리가 난다 ‘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들고 있다.... 그다지 볼품없는 눈사람은 아니다.
이것은 내가 꿈에서 보았던 광경이 아니다. 요즘 들어서 다른 많은 경우에 그러한 것처럼. 오래전에 길을 잃었지만 아무 곳에도 이르지 못할 길을 따라 계속 걸음을 옮기는 사람처럼. 나는 바보 같은 느낌을 받으며 그곳을 떠난다.
치안판사는 제국주의자들의 ’ 기다림‘을 허구적인 것, 대중을 호도하기 위한 기만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진보적 마인드를 지닌 지식인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도 제국주의의 잔재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하다. 온정적인 수단으로 제국을 영속화하려는 의도를 지닌 진보주의자. 그가 장님 여인에게 베푸는 온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녀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적당한 일거리를 제공하면 l서 반드시 같은 침대에 누워있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
성적인 욕구는 거리의 여자에게 가서 해결하고 침대 위에 누운 장님 여인에게는 에로틱한 행동을 자제한다. 아몬드유를 온몸 구석구석 발라주면서 이곳에 끌려오기 전 그녀의 어린 모습을 상상하고... 눈가 상처에 대해 생각하고 그 아비의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눈보라를 헤치고 그녀를 유목민들에게 돌려보내주지만... 그로 인해 그는 처참한 상황에 처한다.
그녀를 자신의 방안에 가두고 온갖 부드러운 폭력을 행사하는 것.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의 정화의식 같은 기름바름의 행위가 부드러운 폭력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제국은 야만인들을 길들이기 위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칼과 총으로 정복한다. 치안판사는 칼과 총의 야만성을 알고 있어서 인가... 자신의 ’ 방‘이라는 제국에 이미 제국에 의해 한 번 유린된 장님 여인을 가두고 부드러운 폭력을 행사한다.
눈이 멀고, 다리를 절뚝거리는 그녀는 그녀를 받아주는 유목민들이 세계로 돌아갔다. 치안판사는 마지막 작별의 순간에 그녀가 자신의 작은 제국으로 돌아오길 갈망하지만 그녀는 자유를 찾아 떠난다.
끝없이 판사의 꿈에 무의식적으로 등장하는 아이들과 웅크린 여인... 한결같이 눈이 펑펑 쏟아지고... 아이들은 그 눈을 뭉쳐 성을 쌓는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면 아이들은 모두 사라지고 두건을 쓴 여인만 남아 성벽을 다듬고 있다.... 두건을 쓴 여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그녀의 얼굴을 더듬는다... 어는 순간에는 그 여인이 구워준 빵을 받으려 하기도 하고... 족장처럼 보이는 노인의 말 뒤를 따르는 여인이 되어 그를 바라보는 것으로...
폐허 더미에서 무언가를 끝없이 발굴하던 취미를 지닌 판사는... 이제 변방을 떠나 도시로 돌아가기 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모래더미 속에서 누군가가 (아마도 유목민) 자신이 남긴 글조각들, 제국의 흔적들을 찾아보기를 희망한다. 무엇이라 적어두어야 할까.
이 책의 첫 문장에서 대령은 선글라스를 끼고 변방에 기세등등하게 부임했지만 이 작품의 끝 부분... 야만인들에 의해 기병부대가 전멸하고 겨우 퇴각하여 초라한 지휘관으로 돌아온 그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지 않다. 색안경을 끼고 야만인을 바라보던 그가... 비로소 맨 눈으로 현실을 보게 되었다는 의미인가... 그럴듯하게 포장된 제국의 흔적이 사라졌다는 의미인가..
존 쿳시의 < 야만인을 기다리며 >...... 처음부터 끝까지 모호한 개념은 ’ 야만인‘이 대체 누구인가이다. 제국이 기병대가 저지르는 행동이 가장 야만적이었다는 것을.. 이 책 전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기병대만이 야만적인가? 아닐 것이다. 제국의 부대가 퍼뜨리는 루머를 맹신하고... 그들이 샘플로 잡아온 보잘것없는 어부들... 유목민들을 고문하는 과정을 공포심을 가지면서도 탐닉하듯 바라보는 우매한 민중들의 방관자적 행동도 야만적이다.
권력과 지위에 익숙한 그러나 제국이 파견한 장교들보다는 온건적인 치안판사 또한 비로소 자신이 잡혀온 포로와 똑같은 고문을 당하고서야 진짜 야만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러하다면 이 책은 문명의 탈을 둘러쓴 진짜 야만인( Barbarians)에 대한 고발문이 분명하다. 치안판사의 자기 고백적 독백... 현재형 시제... 지금도 지구상 어디선가 여전히 진행 중인 야만인 섬멸 작전과 제국의 이데올로기, 우매한 민중의 순종... 이기심과 탐욕으로 충만한 진짜 야만인들의 서사가 존재하리라.
세상은 왜 이토록 두렵고 사악하고 야만적인가?
그런데도 여전히 순한 방향으로 굴러가려고 끝없이 자정작용을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잠복된 본질, 진실과 정의, 양심의 목소리... 인간다움에 대한 순수한 열망이 아닐까.
폐허가 된 모래더미에서... 끝없이 우리가 발굴하려고 애쓰는 것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 사라질까 두려운 것들의 목록일 것이다/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나눔 우수도서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