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그만큼 가벼워지는 법이다. 그리하여 가볍게 가을로 떠나는 법이다
<구월의 시> / 조병화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의 여름만큼 무거워지는 법이다.
스스로 지나온 그 여름만큼
그만큼 인간은 무거워지는 법이다.
또한 그만큼 가벼워지는 법이다.
그리하여 그 가벼움만큼 가벼이
가볍게 가을로 떠나는 법이다.
기억을 주는 사람아
기억을 주는 사람아
여름으로 긴 생명을
이어주는 사람아
바람결처럼 물결처럼
여름을 감도는 사람아
세상사 떠나는 거
비치 파라솔은 접히고 가을이 온다
구월이 되었다.
조병화 시인은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의 여름만큼 무거워지는 법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스스로 지나온 그 여름만큼... 그만큼의 무게로... 무거워지는 거라고..
무거웠던 만큼 더 가벼워지는 법이라고, 그리하여 그 가벼움만큼 가벼이, 그리고 가볍게 가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라고....
올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모든 것을 사막화시킬 듯 강렬한 햇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던 폭우... 어쩌면 나는 여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여름 내내. 여름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망각하고서.
막상 가을이 왔다. 달력 한 장을 넘기자마자 거짓말처럼 가을이 왔다.
폭염도 폭우도 사라진... 가을의 초입... 열매들이 영글어간다.
여름의 무거움이 만들어낸 결실이다.
그 험난한 상황 속에서도 기어이 제 할 일을 해낸 나무들... 풀들...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대자연의 모든 생명체들.
나는 무엇을 하며 이 여름을 보냈을까. 그저 가만히 지나가기만을 바랐나 보다.
오직 지나가기만을...
가을이 오면, 더위가 끝난다면, 선선해진다면... 이 모든 가정법 속에 보내버린 내 여름의 결과물은 초라하다.
제대로 무거워진 여름을 보내지 못한 나는 가벼워진 채로 가을을 맞을 수 있을까?
온통 부끄러움으로 가을 입구를 서성인다.
제대로 무거워지지 못한 자가 가벼워질 권리를 누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가 을 날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로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시고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이루시려던 것을 완성하시고...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으며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로도 고독하게 살아....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리고 낙엽이 날리는 시간 이리저리 흔들리며 가로수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가을날... 시인 릴케를 상상한다
바람 부는 거리를 낙엽처럼 걸어가고 있을...
그리고 돌아와 오래도록 잠들지 않고 무언가를 읽고
긴 편지를 쓰고 있을 젊고 푸른 릴케의 모습을...
때가 왔다. 여름의 태만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두배로 분주해야 하는 계절이 왔다... 그런 시간이, 그런 날들이 오고야 말았다.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 2024 12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문학 나눔 우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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