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속 지갑 안에 들어있는 꽃 한 송이, 나는 당신 얼굴을 본다.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신분증을 보여주기 위해,
돈을 지불하려고
혹은 열차 시간표를 확인하느라고
지갑을 열 때마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본다.
꽃가루 한 점은
산맥보다 더 오래되었고
그 산맥들 속의
아라비 산은 아직 젊다.
아라비 산이 나이를 먹어
언덕으로 변할 때에도
꽃의 씨앗은
뿌려질 것이니,
가슴속 지갑 안에
들어있는 꽃 한 송이.
우리로 하여금 산맥보다
더 오래 살게 하는 힘.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 존 버거
압화처럼...
지갑 속 어딘가에
핸드폰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진이 있다.
지갑을 열 때마다 핸드폰을 뒤적일 때마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오래전 나, 현재의 나... 그리고 어쩌면 미래의 나다.
이미 곁에서 사라지고 없는 이의 모습을 사진 속에서 발견할 때
그 사진이 갖는 명징한 현시성에 놀랄 때가 있다.
여전히 살아있기에
또렷이 살아있기에
심지어 그 사진을 들여다보면..... 사진 속 그 혹은 그녀가 존재하던 시간과 공간으로 빠져들어간다.
의식의 시간은 흔히 말하는 차원의 시간이 아닌 것이다.
가슴속 지갑 안에 들어있는 기억의 꽃 한 송이..
우리를 오래도록 살아가게 하는 힘, 근원 그리고 본질.........
시간이라는 난제는 캄캄한 밤하늘과 같다. 모든 일어난 사건들은 제각기의 시간에 새겨진다.
사건들은 때로 밀집되어 일어나고 그 시간들이 겹쳐지지만, 사건들이 밀집되었다고 해도 시간의 길이가 늘어나지는 않는 법이다. 복잡한 밀집 현상 뒤에는 하나의 법칙이 자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시간이 공존한다. 수태되고 자라며 성숙하고 늙고 죽어가는 시간이 그 하나라면 의식이 다른 하나이다.
전자의 시간은 그 자체로 자명한 시간이다. 후자의 시간은 시대에 따라 달리 이해되어 왔다. 의식의 시간에 대한 이해를 제시하는 것, 과거가 미래에 대해 가지는 관계성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여느 문명의 첫 번째 과제라 할 수 있다.
모든 사건에 적용되는 획일적이고 추상적이며 단선적인 시간의 법칙이 현재의 유럽문화가 제시하는 시간에 대한 해석에 의해 만들어져 왔는데, 이 법칙에 따르면 모든 ‘시간들’은 비교되고 통제될 수 있다. 인간의 의식 역시 여느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의식의 시간을 ‘설명’하면서 의식을 마치 지질학적 지층인양 취급한다. 현대인들이 종종 스스로가 만든 실증주의에 희생되어 왔다면 그것은 의식에 의해 창조된 시간을 부정하고 배제한 것에 기인한다.
실제로 우리는 항상 두 가지 시간 사이에 있다
육체의 시간과 의식의 시간.... 사람들은 삶에 존재하는 두 개의 시간이라는 수수께끼 앞에서 그전보다 훨씬 더 고독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존 버거
가끔 나는 책을 한 권 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전적으로 시간에 대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방식에 대한,
그리고 과거와 미래가
하나의 연속된 현재가 되는 방식에 대한 책을
살아온 사람,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은 현재에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군인이 소총을 분해하듯이,
나는 시간이라는 주제를 조각조각으로 나누어 다루고 싶다.
- 예브게니 비노쿠로프
시간에 대한 책이 얼떨결에 두 권이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 책은 시간에 대한 책이 아니라
내가 '사람'에 대해 읽어내려 했던 시간의 흔적이고, 빨강을 붙잡아 활자화시키려 했던 시간의 흔적이다. 아마도 또 다른 책이 나온다면 그 또한 ‘시간’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을지 모르겠다.
내게 시간은 초조함이다. 절박함이고...
그냥 보내서는 안 될 것 같은 책임 혹은 의무와도 같은 것이다.
유년시절, 이른 새벽 아버지의 방에서 들려오던 타자소리가 내게는 일종의 시계였다.
멀리 숲에서 들려오던 인식의 북소리였다.
심박동 같은 그 소리에 끌려
잠자리에서 일어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지를 다지던.... 그 유년의 시간
붉은 벽돌담, 장미넝쿨 집...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곳. 기억 속에서는 언제든 나는 볼 빨간 어린 소녀가 된다.
박제처럼 존재하는 사진 속.
수많은 당신과 그리고 당신이라 불리는 이들과 어떤 형태로든 엮여있었던 나를 바라본다.
이천이십오 번째 12월이 간다.
고요한 아침.
며칠이 지나면 우리는 호들갑스럽게 이천이십육 년의 1월을 맞이할 것이다.
제라늄의 붉은 꽃이 곱다. 모처럼 물을 주었다/ 려원
<빨강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