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것과 꽃피는 모든 것을 위해 건배

하루에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나는가/ 파블로 네루다

<하루에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나는가>

파블로 네루다

하루가 지나면 우리는 만날 것이다

그러나 하루 만에 많은 일이 일어난다

거리에서는 포도를 팔고

토마토는 껍질이 변한다

그리고 당신이 좋아하던 소녀는

다시는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 예고 없이 우편배달부가 바뀐다

이제 편지들은 더 이상 전과 같지 않다

...

오래된 껍질을 지닌 대지가 그토록 많이 변하리라고

누가 우리에게 말해 주었는가?

어제보다 더 많은 화산이 생겨나고

하늘은 새로 생겨난 구름들을 가지고 있으며

강물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

그러니 사랑이여, 모든 것을 위해 건배하자.

추락하는 것과 꽃피는 모든 것을 위해 건배


어제를 위해 그리고 오늘을 위해 건배

지나간 날들과 다가올 날들을 위해 건배

빵과 돌을 위해 건배

불과 비를 위해 건배

변화하고 태어나고 성장하고

소멸되었다가 다시 입맞춤으로 돌아오는 것들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공기와

우리가 살고 있는 대지를 위해 건배


우리의 삶이 시들어가면

그때는 우리에게 뿌리만 남고

바람은 미움처럼 차갑겠지

....

낮뿐 아니라 밤을 위해서도 건배

영혼의 사계절을 위해 건배



수많은 일이 일어난다

이란의 초등학교 폭격,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 바퀴가 고속버스로 날아들어 운전자 사망, 스토킹 살해, 중학생 추락사... 국제 정세 불안...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일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 개인적으로 벌어지는 일들...

내가 알지 못하는데 일어나고 있는 일들...

내가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일들...


오래된 대지의 껍질을 뚫고 어린싹이 나오고 있다.

보도블록 틈 사이로 다시 번지는 초록들

이미 죽은 것 같은 나무, 지난가을의 잎을 아직도 달고 있는 나무는 해쓱한 얼굴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온도차가 크다. 일찍 베란다 밖으로 내놓은 제라늄과 장미 잎이 얼어있다.

서둘러 봄이라 생각했는데 식물에겐 아직 이른 것이다.

한때 제라늄에 빠져 화분마다 제라늄을 심었었다.

제라늄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꽃이었다. 유년의 화단에는 보드라운 쿠션 같은 초록잎, 끝없이 꽃대를 올리는 붉은 꽃, 분홍꽃들이 있었다. 눈이 내리는 한 겨울에도...

눈 내리는 날 부지런히 꽃대를 올리는 제라늄을 바라보면 문득 세상이 봄처럼 여겨지곤 했다

그 제라늄들이... 얼어붙은 채로...

참혹한 표정으로 서 있다. 줄기는 마르고 잎은 타들어갔다. 꽃대를 올릴 힘조차 없는 늙은 꽃처럼.... 무언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삶과 죽음의 문제임을 새삼 깨닫는다

살아날 수 없는 것들은 정리하고 그래도 아직 희망이 있는 화분들을 다시 옥탑방안으로 들여놓았다. 당분간.... 이 추위가 물러날 때까지..

이미 추락해 버린 제라늄과 아직 꽃 피울 수 있는 제라늄을 위해 건배라고 말하고 싶다.


아무 예고 없이 우편배달부가 바뀐다.

이제 편지들은 더 이상 전과 같지 않다


손 편지를 써본지가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지금은 누가 나의 편지를 전해줄지 우편배달부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지금은 내게 날아온 손 편지를 가져온 우편배달부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집마다 우편함이 대문에 걸려있던 시절

유년의 나는 우체부 아저씨의 얼굴을 기억한다.

불록한 갈색 가방, 우체부 모자를 쓴 아저씨가 땀을 뻘뻘 흘리며 집집마다 편지를 우편함에 넣곤 했었다.

당연코 우리 집은 편지가 많았다. 아버지 앞으로 배달되는 것들... 학창 시절의 내게도 편지가 많이 왔었다.

아저씨는 내 이름을 부르며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묻곤 했다.

바로 '나'라고 밝혔는지 밝히지 않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미 그도, 그가 메고 있던 갈색 자루 같은 가방도, 그가 건네주던 편지들도 사라졌다.

파란 대문집 우편함은 그대로 남아있을까...

이제 편지들도 삶도 예전과 같지 않다. 나도 ...


추락하는 것과 꽃피는 모든 것을 위한 건배.

어제 그리고 오늘을 위해, 지나간 날들과 다가올 날들을 위해 건배...

변화하고 태어나고 성장하고 소멸되었다가....

다시 입맞춤으로 돌아오는 것들을 위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대지의 굳은 껍질을 깨고 부지런히 고개를 내미는 연두를 위해

무심코 밟고 지나버리는 보도블록 틈 사이로 안간힘을 쓰는 연두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정언명령 하나 붙들고

발버둥을 치는 세상 모든 숨탄 것들을 위해... 건배한다

여전히 어디선가 손 편지를 쓰고 있을지 모르는 이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여전히 오늘을 시작하는 나를 위해서도..............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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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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