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과 종이 그리고 공기 한 모금

메리 올리버의 긴 호흡을 기억하며... 걷는 아침

펜과 종이 그리고 공기 한 모금

나는 30년 넘게 늘 뒷주머니에 공책을 넣고 다닌다. 항상 가로 3인치. 세로 5인치의 작은 크기에 손으로 꿰매어 만든 같은 종류의 공책이다. 이 공책에 시를 쓰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결국 시에 등장하게 될 문구들이 담겨있다. 그러니까 이 공책들은 내 시의 시작인 셈이다.... 공책에 적힌 문구가 아이디어 가운데 일부는 영영 완성된 산문이나 시로 도약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나의 무의식 속에서 스스로를 갈고닦지 않거나, 나의 의식에게 선택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일시적이거나 덧없는 이치를 담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고 어쩌면 추운 날 뿌리는 씨앗일 수도 있다.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하나의 아이디어는 채택되기 전에 여러 문구들에 등장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나는 이 공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쓰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무질서하게 사용한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지는 대로 쓴다.... 내 기록은 어법과 리듬에서 극도의 정확성을 띤다. 옛날에 쓴 공책에서 이런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나무들은 본다/ 자신의 몸을/빛의 기둥으로/만들고 있는”

“언어의 정제된 고통이/ 그를 지나갔다.”

기록은 그게 무엇이든 내가 그걸 쓴 이유가 아닌 느낌의 체험으로 나를 데려간다. 이건 중요하다. 그러면 나는 그 아이디어 곧 그 사건의 의미에 대해 돌이켜 생각하기보다는 아이디어가 나오기 이전부터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내가 공책에서 포착하고자 하는 것은 논평이나 생각이 아니라 그 순간이다. 그리고 완성된 시 자체에서 포착하고자 하는 것도 물론 이와 같은 경우가 아주 많다.

“마음은 찢어지는 게 찢어지지 않는 것보다 낫다.”

“모두가 힘의 작은 이빨을 가져야 한다. 모두가 물 수 있기를 원한다.”


나는 열심히 책을 읽으며 기술을 연마하고 확실성을 얻어갔다. 나는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 헤엄치는 것처럼 읽었다. 그리고 그렇게 글을 썼다. / 메리 올리버


잡초 우거진 모래 언덕으로 돌아간 메리 올리버

“내게 일이라 함은 걷고, 사물들을 보고, 귀 기울여 듣고, 작은 공책에 말들을 적는 것이다.”

그녀의 긴 호흡을 느낀다.

보고 듣고 관찰하고 수첩의 아무 데나 펼쳐서 순간을 붙잡아두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한다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 읽고 쓰는 일...

많이 느슨해져 있다. 나는 요즘...

계절은 어김없이 자신만의 속도로 자기 안의 힘센 것들을 뽑아 세상을 초록으로 바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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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 뒤로 기온이 떨어졌다.

그 밤 사이 연두는 좀 더 힘을 얻었고

이미 초록을 입은 연두도 있었다

죽음을 딛고 일어서는 것들...

개와 주인의 산책 시간.... 고양이들의 나른한 몸짓,,,

한결 봄다워진 산책로에서... 무서울 정도 강인한 생명의 힘을 본다.

틈을 비집고 나오는 것들. 오직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메리 올리버는 공책에 적힌 메모 중 완결된 글로 채택되지 못한 생각의 파편들을

‘어쩌면 추운 날 뿌리는 씨앗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추운 날 뿌려둔 씨앗... 그 긴 기다림의 시간을 뚫고 나온 씨앗들은 얼마나 더 강한 힘을 지니게 될까?

나는 번 아웃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쩐지 그 말은 자기 합리화 혹은 패배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부활 미사 중 이런 생각을 했다

날마다 후진 없이 앞으로만 가고 있는 나에 대해서

속도 조절 장치가 풀려버린 이처럼... 앞으로만 가고 있는 어지러움에 대해

펜과 종이 그리고 공기 한 모금 만으로 행복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보이지 않는 땅의 시간. 그러나 언젠가 그 땅을 딛고 일어나리는 희망을 품었던 오래전 언젠가를 그리워한다.


모두들 어딘가로 가고... 어딘가에서 오고 있다

시는 일종의 ‘유리병 편지’와 같다

그 유리병이 언젠가 그 어딘가에

어쩌면 누군가의 마음의 해안에 가 닿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시인이 유리병에 담아 띄우는 편지 말이다

= 파울 첼란


시인들은 세상에, 세상의 바다에 수많은 유리병 편지들을 투척하는 이다.

유리병 하나... 누군가의 마음의 해안에 가 닿으리란 희망

끝내 닿지 못하고 끝내 표류할 수도 있지만

어딘가에 닿으리라는 그 희망 하나로 세상에 던지는 마음 하나....

4월이다... 연두의 속도가 빨라졌다. 그와 동시에 마음이 두려워진다. /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 202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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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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