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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 이미지의 반란             

  르네 마그리트는 분명 파이프 그림을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었다. 언어와 사물과의 관계는 그 사물을 이해하는 사람들 간의 약속일뿐 완벽한 실체라고 보긴 어렵다. 우리가 실체라고 부르는 것은 어쩌면 허상인지도 모른다. 그림 속 파이프는 실제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 모양으로 그려진 것에 불과하다. 파이프는 담배를 피울 때 사용하는 것인데 그림 속 파이프로는 담배를 피울 수가 없다. 다만 ‘파이프’라는 명칭을 붙여 놓은 그림일 뿐이므로 진정한 파이프는 아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실체들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용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어떤 이미지에 언어적 기호를 붙이며 ‘이것을 00이라 하자’라는 사회적 약속을 한 것이다. 존재하는 사물들은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약속의 결과물이지 바로 그것이 사물의 실체는 아니다. 사물의 존재 이유는 될지 모르나 사물의 실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르네 마그리트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부정함으로써 실체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든다. 우리는 세상에 이름 붙여진 사물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파이프니까 당연히 파이프겠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굳이 부정할 필요까진 없잖아? 안 그래?’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은 반전이 숨어있다.  ‘파이프지만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말로 ‘파이프니까 파이프일 것이다.’는 당연한 것들을 뒤집는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은 인지적 구두쇠인 우리에게 인지적 충격을 준다.


  연필 한 자루를 꺼내어 놓고  ‘이것은 연필이 아니다’라고 말해보자. 그러고 보면 연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가운데 흑연으로 된 검은 심이 있고 그 주변을 나무가 감싸고 있는 원기둥 혹은 육각기둥 모양의 물건을 우리는 당연히 ‘연필’로 불러왔다. 하지만 이것을‘연필’로 부르자는 것은 언어적 약속의 산물이지 정말 ‘연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연필’이라 알고 있는 문화권 내의 사람들에게만 유효한 약속에 불과하다.

  만일 ‘연필’이라는 물건을 접해보지 않은 아프리카 오지 부족에게 ‘연필’을 가져가면  그들은 연필의 용도를 구멍을 뚫는 도구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들은 ‘연필’이라는 명칭 대신 자신들의 문화에 익숙한 언어를 붙이려 할 것이다. 우리가 ‘연필’이라 부르는 것을 그들은 ‘옹그스’ 라 부르며 구멍을 뚫는 데 사용할 수 있다. 이처럼 어떤 사물과 사물의 특성, 사물의 이름을 서로 연관 지어 부르는 것은 언어의 특성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연필이 아니다’는 말은 옳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 거울에 비친 ‘나’를 보고 ‘이것은 내가 아니다’라고 정의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라는 실체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지갑에서 운전면허증이나 주민등록증, 여권을 꺼내거나 내 이름이 새겨진 인감도장을 꺼내거나, 주민센터에 가서 주민등록 등본을 떼거나 최종 학위 증명서를 발급받거나 직장에서의 경력 증명서를 떼거나... 아니면 관계 속에서의 나를 확인하는 방법이다. 동아리 회원, 강사, 수필가, 며느리, 엄마, 아내, 친구, 학부형, 동료, 이웃, 고객, 입주민, 가톨릭 신자, 시민, 소비자, 구독자, 국민인 나. 그런데 서류상으로든 관계상으로든 그것이 ‘나’의 본질이며'나'의 실체이며 '나'의 전부인가를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모든 것들을 따로 분리해서 ‘나’라고 할 수 없고 이 모든 것들을 뒤섞어서 ‘나’라고 하여도 완전한 ‘나’는 아니다.


‘나’라고 말하는 것은 ‘나’의 일부일 뿐이다. 수많은 ‘나’ 중의 일부를 용도에 따라 끄집어내어 ‘나’인 것처럼 생각할 뿐이다. 거울 속의 나는  분명 ‘나’이면서도 분명 내가 아니다. 거울을 바라보기 전의 ‘나’와 거울을 바라본 후의 ‘나’는 또 어딘가 분명 달라졌을 테니... 눈으로 보이지 않는 내 세포 중 일부는 이미 죽었거나 새로 태었났을 테니.... 지금 눈에 보이는 '나'와 조금 전의 '나'는 엄밀히 같은 ‘나’는 아니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작품은 사물뿐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실체에 대해 한번쯤 의문을 품게 만든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묻고 싶은 날이다.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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