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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들 Oct 05. 2022

한양 도성 이야기

세검정 찍고 백사실 계곡으로

1.

어스름한 저녁, 달을 바라보는 늙은 신하의 눈은 떨리고 있었다. 눈은 가늘었으나 결기를 담고 있었다. 임금의 폭정으로 민심은 크게 흔들리고 작금의 당쟁으로 죽고 죽이는 살육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대로 가다간 나라가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목숨으로 무너진 조정을 바로잡을 수만 있다면....”

노신은 백악에서 흘러내린 물이 잠시 소(沼)를 이루는 계곡에 이르자, 허리에 매고 있던 칼집에서 칼을 꺼냈다. 칼은 달빛에 시퍼런 서슬을 드러내었으나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었다. 그는 꺼낸 칼을 물로 씻은 다음 날을 세우기 위해 바위 모서리에 걸 터 앉았다. 칼을 가는 동안 만감이 교차했으나 칼 갈기를 멈추었을 때 가다듬지 못했던 마음이 드디어 굳어졌다.

계곡물에 비친 달빛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을 무렵 장수 하나가 탁주 한 사발을 건넸다. 가슴이 답답하던 차에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심한 갈증을 해소했으니 이제 인경이 울리면 창의문을 향해 일제히 돌진해야 한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운명의 시간. 후세의 사가들은 오늘의 일을 어떻게 기록할까? 공신이냐 역적이냐? 실패하면 만고의 역적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리자 칼을 쥔 그의 팔목에 힘이 들어갔다.     


세검정(洗劍亭)은 홍제천 상류 백사실 계곡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진 정자로 예사스럽지 않은 역사를 품고 있었다. 백악산과 인왕산의 산세가 만나 수려한 경치를 자랑하는 이곳은 예로부터 백석동천이라 불리며 많은 시인 묵객의 사랑을 받았던 지역이다. 오늘은 나도 시심을 가득 안고 이곳을 찾았다. 잘 다듬어진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홍제천으로 내려가 보았다. 계곡의 바닥은 커다란 암반으로 이루어져 수 십 명이 한꺼번에 모여 즐길만했다. 조심스레 내려서니 사뭇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산을 향해 펼쳐진 암반 계곡의 풍경도 새롭고, 키를 훌쩍 뛰어넘어 올려다보는 정자의 모습이 비범하다. 위치를 달리하면 보는 세상도 달라진다는 것을 실감한다. 

2.

초가을 볕이 제법 강렬하다. 맨얼굴이 그을릴 것을 걱정하며 그늘을 찾았다. 백사실 계곡을 가는 길은 세검정에서 홍제천을 따라 마을로 들어서면 된다. 차량 한 대가 힘겹게 사람들을 피해 가는 도로변은 시간이 잠시 멈춘 듯했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이며, 허물어져 가는 벽으로 둘러싸인 건물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곳에서는 추억의 음악이 흐르고 향긋한 커피 향이 피어올랐다. 담벼락의 작은 화분도 꽃을 피워내며 향기를 흘리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동네

평지를 걷다 보니 안내판은 자연스레 경사진 골목길로 이끌었다. 본격적으로 백사실 계곡으로 접어들었다. 실개천이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고 계단길 담벼락엔 무릉도원이라 쓴 팻말이 걸려있다. 무릉도원이 별거더냐?   

잠시 호흡을 다스리고 마지막 계단까지 오르고 나니 다시 너른 암반이 나오고 그 곁에는 절집이 자리 잡았다. 삼각산 현통사. 절묘한 곳에 자리한 절 집과 그곳을 휘돌아 가는 물줄기, 본격적으로 만나는 백사실 계곡이다.

현통사를 지나는 계곡물, 백사실 계곡이다

백사실 계곡은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어 더욱 신비롭다. 백사 이항복과 관련이 있느니 추사 김정희와 인연이 있느니..... 집터는 오래전에 무너졌는데 떠도는 이야기만 이 공간에 머물며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별서 터


짙은 녹음 속 한 줄기 바람에도 계곡물은 흔들린다. 수많은 시인 묵객은 이곳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휑한 집터의 고목들이 쓸쓸함을 더 한다. 짙은 나무 그늘에서 땀을 식히다가 능금마을로 간다.

자연을 느끼며 휴식을

  

낮은 언덕을 오르자 백석동천이라 새긴 바위가 옛 시절의 영화를 아쉬워하는 듯하다.   

백석동천이라 부를 만한 경치를 품었다.


오늘 나는 옛 시인 묵객의 발자취를 따라 세검정을 거쳐 백사실 계곡을 싼득싼득 걸었다. 초가을 날씨는 걷기에 최적이었다. 짙은 녹음 속 맑은 바람 소리가 귀를 간지럽히고 눈을 감으면 풀벌레 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는 도심 속 휴식처. 햇살이 그대를 유혹한다 싶으면 반드시 걸어 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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