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은 머리숱, 하얗게 센 귀밑머리. A는 약간 굽은 어깨를 들썩이며 아내를 재촉하고 있었다. 가파른 지하철 입구 계단을 오르자 눈이 부셨다. 파란 하늘은 마냥 시렸고 잎이 무성해진 가로수는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퇴직하고 야인 생활을 한 지 7년째, 자식들이 분가한 뒤로 그는 아내와 추억여행에 열심이었다.
추억 속의 공간을 걷다
--- 서울대공원이 개장 기념으로 무료입장을 실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 A와 여자는 서울대공원으로 향했다. 주머니가 가벼웠던 그들은 데이트할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공원은 개장 초기의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휑한 벌판에 이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무들은 그늘을 만들지 못했다. 벤치는 듬성듬성 있었고 관람객보다 작업자들이 더 많아 보였다. 동물들도 이곳의 풍경이 낯선지 자주 허공을 향해 울부짖었다. 두 사람은 공원을 샅샅이 훑을 생각이었으나 그건 헛된 욕심이었다. 워낙 규모가 큰 데다가 안내판도 제대로 없어 얼마 못 가 지친 탓이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 A는 이곳을 다시 찾았다. 곁에는 어린 자식이 둘이나 있었다. 머리에 울긋불긋 장식을 한 아이들은 먹느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인파 속에서 아이들 시중을 들다가 부부는 진즉 파김치가 되었다.---
서울대공원 안내판을 보자 오래전 추억이 떠올랐다. 햇살이 좋은 주말이라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연인들, 아이들을 동반한 부부들, 그리고 희끗한 중년들 속으로 들어갔다. 대공원 주변은 새 건물들이 몇 동 들어서기는 했으나 들뜬 분위기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아이들을 유혹하는 장난감과 간식거리들이 길 양옆으로 길게 늘어섰다. 동물원 입구까지 코끼리 열차를 외면하고 걷기로 했다. 사람들 틈에 섞여 걸으며 아내의 손을 꼭 쥐었다. 가는 손목, 부드러운 스웨터 위로 늘어뜨린 머릿결에서는 샴푸 향이 느껴졌다. 미리내 다리에서 호수 건너 익어가는 단풍을 보느라 한참을 머물렀다.
도로 반대편 호수 위로는 스카이 리프트가 동화 속 하늘을 나는 빗자루처럼 지나고 있었다.
가끔 코끼리 열차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싣고 도로를 질주하였다. 가로수는 하나둘씩 잎을 떨어뜨려 겨울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낙엽을 주워 든 손등에 주름이 내려앉았다. 느린 걸음으로 살아온 것 같았는데 세월은 코끼리 열차만큼 빨리도 흘렀구나! 동물원 입구에 이르자 코끼리 열차는 사람들을 뱉어냈고, 한꺼번에 쏟아진 사람들은 일제히 말들을 뱉어냈다.
동물원 입장권을 구입할까 망설이는 데 아내가 옷깃을 끌며 산책이나 하자고 했다. 공원을 빙 둘러 조성된 길은 2개였는 데 하나는 총길이 4.5km에 이르는 동물원 둘레길이고, 다른 하나는 7km의 산림욕장 길이다. 예전에 걸었던 동물원 둘레길을 얼마간이라도 걷기로 했다. 작은 개울이 나왔다. 나무들은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고 얕은 물속에서는 비단잉어들이 유영하고 있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여울, 병풍처럼 우거진 숲과 투명한 하늘, 다리에서 보는 계곡 쪽은 비경을 품고 있었다. 이곳을 지나야 산책길은 시작됐는 데 여기서도 좀처럼 다리를 건너지 못했다.
동물원 둘레길을 조금 걷자 아내는 지친 기색을 비췄다. 체력이 예전만 못했다. 쉴 곳을 찾다가 길을 되돌아가기로 했다.
휴(休), 여유를 누리다
산책로 입구 갈림길에서 호수로 난 길로 들어섰다. 미리내 다리에서 눈길을 사로잡던 가을색의 그 숲으로 난 길이었다. 아름드리 메타세쿼이아가 하늘을 가린 데다가 군데군데 쉴 곳이 있어서 좋았다. 전경이 탁 트인 곳에 자리를 잡았다. 먼저 온 사람들은 도시락이며 과일이며 먹거리와 이야기들을 풀어내었다. 풍경과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숲은 평화로웠다. 부부는 한동안 '숲멍'하였다. 입을 잠시 닫자 날카로운 시선도 함께 무디어졌다. 호수를 건너온 바람이 뺨을 스쳤다. 바람에도 짙은 가을색이 묻어있다.
인생을 4계절로 친다면 어디쯤 와있는 걸까? 청춘을 보내고도 아직 남은 열정으로 보아 이 계절의 초입쯤에나 왔을까 싶었다. 마음을 비워내자 진중한 인생 질문들이 스멀스멀 나오려고 했다. 무거운 마음은 그만! 살아오면서 이런 질문에 익숙하지 않았던 터라 A는 서둘러 고갯짓으로 모두 떨구어 버렸다. 아내를 힐끗 보니 눈을 감은 채 고른 숨을 쉬고 있었다. 잠이 든 건지 명상 중인지 모르지만 곁에서 슬며시 눈을 감았다.
한 무리의 웃음소리로 숲 속 공기의 파동이 바뀌었다. 감았던 눈을 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허기가 느껴졌다. 자리를 뜨기 아쉬웠지만 고픈 배를 이길 수는 없었다. 준비 없이 온 것이 몹시 후회되었다. 도시락을 챙겨 다시 소풍 와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아내를 흔들었다. 가을이 파르르 허공을 가르며 호수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