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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들 Oct 11. 2022

자경전에서 비(雨)멍을

자경전의 십장생 굴뚝과 꽃담 이야기

침소에서 대비는 주름진 손등을 어루만지며 문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을바람이 한기를 띄고 있었지만 어깨를 움츠릴 정도는 아니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담벼락을 비치고 있었다. 주황색 톤을 띠고 있는 담벼락은 햇살을 받아 더욱 화사롭게 빛났다. 꽃담. 궁궐로 들어오기 전 친정의 담벼락이 생각났다. 황톳빛을 띤 담벼락에 새겨진 알 수 없는 꽃과 동물의 형상, 그리고 숫자 등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담장 안에 장독대가 가지런히 있어 장 익는 냄새가 났고 그 옆에는 석류나무가 있었다. 장독대 주변으로 심어져 있던 봉숭아로 손톱에 물들이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자  대비의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 시절이 좋았지" 대비는 입 밖으로 나오려는 소리를 울대 안으로 삼켰다.




경복궁은 언제 가도 좋은 곳이다. 궁궐의 웅장한  규모에 압도되다가도 건축물 하나하나에 숨겨진 의미와 아름다움을 알아가는 것이 좋았다. 궁궐은 수많은 이야기를 담았다가 적당한 때에 보따리를 풀었다. 궁궐을 방문한 날 빗줄기가 거세었다. 뜻하지 않게 우중 궁궐 산책을 하게 된 셈이다. 관람객들은 걷는 대신 누각의 처마 밑이나 마루에 걸 터 앉아 비멍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가롭게 보일 수가 없었다.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때가 얼마 만이던가? 처마 끝의 낙수 소리가 그 어떤 음악보다 가슴을 때린다.  비가 오는 가운데 자경전을 한 바퀴 돌아본다.

자경전은 고종 때 신정왕후 (조대비)를 위해 지어진 대비전으로 꽃담과 십장생 굴뚝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자경전의 꽃담이야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굴뚝이 보물로 지정된 것은 오늘에야 알았다. 자경전의 굴뚝은 아미산 굴뚝과 더불어 최고로 친다. 대비전에 불을 지필 때 연기를 내보내기 위해 만든 굴뚝에 기와를 올리고 배출구를 10개 만들었다. 배출구의 모습을 멀리서 보면 꼭 기와집 형상이다. 굴뚝의 몸체에는 대비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십장생을  굴뚝에 가득 수놓았다. 제일 아래에 상상의 동물 서수를 배치했고, 중간에는 십장생과 포도, 연꽃 , 대나무, 백로 등 상서로운 무늬로 조각하고 회칠을 했다. 윗부분에는 학과 도깨비 문양을 새겨 놓았다.

찬탄이 절로 나온다. 벽에 그린 그림이 어찌 이리 섬세할 수 있단 말인가? 워낙 희귀한지라  지금은 비바람, 햇빛으로부터 굴뚝의 훼손 방지를 위해 지붕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다.


자경전 부속건물로 궁중 여인들의 연회 장소인 청연루가 있다. 궁궐에 갇혀 지내는 여인들의 답답함을 풀어주는 해방공간이다. 빗소리는 마치 연회를 즐기는 여인들의 웃음소리처럼 들렸다. 빗줄기가 굵어져 한참 동안을 마루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빗속에서  청연루의 돌출된 누각을 바라보며 멍 때리기 참 좋았다.




도심 생활에 지칠 때면 그래서 일부러 궁궐을 찾게 되나 보다. 가을이다. 고궁은 형형색색으로 옷 갈아입을 채비를 한다. 이맘때가 하늘은 끝없이 푸르고 나무들은 가장 화려하니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게 된다.  찍는 사진마다 인생 샷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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