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있던 습관

by 여노노

엄마는 엄청난 독서 광이었다.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 연재 당시에 사 모은 초판들을 전부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소설을 좋아했다. 지금은 사라진 베텔스만 북클럽의 카탈로그 우편이 올 때면 함께 머리를 맞대어 책을 고르고 주문하는 것이 우리의 꽤 쏠쏠한 재미였다. 엄마는 특히 존 그리샴의 추리 소설들을 애정했는데, 그의 신간은 주문 목록에서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 건 엄마의 영향이 클 것이다. 우리는 <해리 포터>, <다빈치 코드>, 박완서 선생님의 책 등을 함께 읽었다. 일주일에 네 권씩 배달 오는 나의 북클럽 책도 같이 봤다. <해리 포터> 읽기를 내가 먼저 시작했음에도 엄마는 그 속도를 금방 따라잡아 미처 읽지 못한 부분을 알려준다고 장난치곤 했으니까. 엄마가 최고로 꼽는 소설인 <토지>는 읽으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초반 몇 권은 세로 읽기에 한문이 가득해 감히 읽을 엄두를 낼 수 없을 만큼 오래된 것이라 볼멘소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엄마는 항상 누워서 책을 봤다. 하교 후 집에 돌아와 가장 먼저 마주하는 건 내 침대에 누워 책을 보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나도 책 한 권을 집어 들어 엄마 옆에 누웠다. 엄마는 그때마다 눈 나빠진다, 좋은 버릇이 아니다,라며 앉아서 독서할 것을 종용했지만 누워서 책 보기는 습관이 됐다. 그러다 보니 앉아서 활자를 읽는 건 퍽 어색하다. 아무리 버릇이 그렇다고 한들 회사에서 대본을 읽을 때도 누워있을 순 없다 보니... 오래된 습관은 쉽게 휘발되었다. ​


단순히 놀이로서 책을 집어 든 건 참 오래간만이다. 독서모임에서 선정된 책을 모임 직전 벼락치기하거나, 서평을 남기기 위해 면밀히 뜯어보며 읽는 것이 최근의 양상이다 보니 아무런 부담 없는 독서가 이리도 즐거운 일이구나 싶어 생경하다. 자연스레 책을 집어 들고 침대로 가 모로 누워 펼쳐본다. 그러자 책 읽기를 갈급했다는 걸 깨닫는다. 책장이 쑥쑥 넘어간다. 하긴, 요새 자기 전 누워서 맨날 유튜브 영상만 봤지 책을 잡은 건 언제인지 아득하기에. 근데 어라, 이 묘한 편안함은. 잊고 있던 와식 독서습관이다. 내 손에 들려있던 휴대폰을 책으로만 바꿨을 뿐인데 그 시절 향수를 자극한다. 그래 맞아, 나는 글 읽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잘 쓰인 글을 보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환희에 차오르는 사람이다. ​


오늘은, 살다가 지치는 날에 잠시 도망갈 수 있는 어린 날의 귀여운 습관을 발견한 값진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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