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체력

by 여노노

선배와 나는 이번 출장을 매우 고대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꽤 긴 기간 - 4박 5일 - 동안 한국을 벗어나 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를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선배는 선배 나름대로 설렌 이유가 있겠으나 나는 무려 십오 년 전 방문했던 싱가포르의 기억을 다시 마주할 생각에 있는 힘껏 기대를 부풀렸다. 그래서인지 빽빽한 일정표를 받아 들고도 마냥 일렁거리었다. 더구나 갑작스레 찾아온 서울의 한파를 모두가 걱정할 때 더운 나라로 떠날 나는 남의 집 불구경하듯 여유로웠다. 하필 출장 기간에 찾아온 한파를 피해 더운 나라로 출장 가는 모양새가 마치 사랑의 도피라도 되는 듯 비장하고 유치했다. 너무 추운 고국을 떠나 따뜻한 나라로 휴양하러 가는 부자들이 된 것만 같았다.

올해 운동으로 담금질한 체력을 과신해서일까. 분 단위로 적힌 빈틈없는 일정을 간과해서일까. 이른 오전 출발하는 항공편을 위해 새벽 네 시부터 움직이랴, 덥고 비가 많이 오는 습한 날씨에 적응하랴, 밤늦게까지 이어진 일정 소화하랴, 첫날은 베개에 머리를 대기가 무섭게 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시차는 고작 한 시간밖에 되지 않는데도 잠의 세계에선 억겁의 시간이다. 평소 잠들던 시간에 잘 수 없다는 건 몸을 혼란스럽게 한다.

다음 날, 몸이 너무 찌뿌둥해 계획한 아침 운동과, 이어진 두 시간의 트래킹 일정을 소화하고 나서도 멀쩡했다. 한 바가지 흘린 땀만큼 엔도르핀이 나와 짜릿했다. 그러나 많은 동료들이 함께 소화하는 일정 안에서 일순간 부대낀다는 감정이 올라올 땐 뭔가 이상했지만 이내 가라앉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상대의 작은 언행이 나를 할퀴어 고슴도치가 경계하듯 가시를 있는 힘껏 부풀리기도 했으나 찰나였으니 느닷없는 더위가 일으킨 순간의 감정이라 여겼다. 그러나 가시를 세우는 빈도가 잦아들고 하루의 끝에는 합죽이가 된 것 마냥 말을 잃었다.

정갈하게 씻고 침대에 누워 하루를 복기하니 알겠다. 상대가 나를 긁어 언짢은 게 아니라, 이 모든 낯섦을 소화할 체력이 부족한 거였다. 체력이 고갈되면 정신을 사사롭게 한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자신에게 비수처럼 꽂히는 말은 바닥난 체력이 곡해한 마음의 소리이다.

활기찬 내면을 위해 충분한 수면과 규칙적인 운동으로 체력을 한껏 끌어올린다. 단단한 심지를 기반으로 마음을 넓게 쓰기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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