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 한 켠 작은 책장에는 상뻬의 <각별한 마음>이 한 권 놓여 있다. 책등이 보이도록 꽂아둔 게 아니라 정면에서 책표지를 볼 수 있도록 놓아둔 것이라서 '꽂혀 있다'는 단어 대신 굳이 '놓여 있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표지가 예뻐서 그림처럼 전시하듯 세워뒀는데 그러다 보니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책의 표지를 보게 된다.
빨간 꽃으로 가득 찬 온실 속에서 한 여자가 쪼그리고 앉아 일을 하고 있다. 그림 중앙에는 온실 문이 하나 있는데, 살짝 열린 문 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다. 파란색 꽃다발을 든 채로.
나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빨간색 꽃을 좋아하는 여자에게 파란색 꽃다발을 선물하는 남자에 대해 생각한다. 남자의 무신경함에 괜히 짜증이 치미는 날도 있다. 커다란 온실을 온통 빨간 꽃으로 채울 만큼 빨간 꽃을 좋아하는 여자에게 굳이 파란 꽃을 선물하는 이유는 대체 뭐지?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해본 건가?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걸, 아니 자기가 주고 싶은 걸 주면 그걸로 끝인 거야?
파란 꽃을 받아든 여자가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서도 상상한다. 지극히 형식적인 감사 인사를 하며 꽃을 받아놓고는 남자가 돌아가자마자 파란 꽃을 쓰레기통에 쳐넣는 여자도 있고, 뚱한 표정으로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보시다시피 저는 빨간 꽃을 좋아해요.'라 말하며 남자를 돌려보내는 여자도 있다.
하지만 마음이 좀 말랑말랑한 날에는, 빨간 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굳이' 파란 꽃을 선물하는 마음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한다. 말랑말랑한 가상 세계에서 남자는 이런 고백을 하며 파란색 꽃다발을 건넨다. '당신이 좋아하는 게 빨간 꽃이라는 사실은 물론 알고 있어요.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만큼 실컷 빨간 꽃을 바라봐요. 제가 당신 대신 여러 색깔의 꽃을 구경하고, 그 중에 제 눈에 제일 예뻤던 걸 보여줄게요. 우리가 책을 읽는 건 세상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잖아요. 제가 주는 꽃을 아직 읽지 않은 책이라 생각하고 받아주세요.' 남자는 여자가 빨간 꽃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꽃을 돌보다가 틈만 나면 책을 읽는 책벌레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래서 이 파란색 꽃다발은 남자가 여자에게 전하는 각별한 마음이다. 그렇다면 여자는 남자의 각별한 마음에 어떻게 반응할까? 여러 번 상상을 해봤지만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뛸 듯이 기뻐하며 꽃다발을 냉큼 받아드는 여자의 모습은 아무래도 그려지지 않는다.
내가 생각한 제일 말랑말랑한 버전의 결말은 이거다. 일단 생전 처음 파란색 꽃다발 선물을 받아 본 여자는 당황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게 빨간 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남자들은 대부분 빨간색 꽃다발을 선물해줬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받는 빨간색 꽃다발은 늘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다. 여자가 특히 견딜 수 없었던 건 '나는 당신이 빨간 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라며 묘하게 으스대는 듯한 남자들의 태도였다. 여자의 마음을 공략하겠다는 일념으로 치트키를 연신 두들겨대듯 그들은 빨간색 꽃다발을 퍼부어댔고 그게 싫었던 여자는 단 한 번도 빨간색 꽃다발을 받아주지 않았다. "보시다시피 빨간 꽃은 여기에도 넘치게 많아서요. 그리고 제가 가꾼 꽃이 그 쪽이 가져온 꽃보다 더 예쁘네요." 팔짱을 낀 채 이렇게 말하면 남자들은 빨간 꽃만큼이나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황급히 떠나가곤 했다. 하지만 파란색 꽃다발은 어떻게 해야 하지?
생전 처음 받아보는 파란색 꽃다발이 낯설었던 여자는 어정쩡하게 꽃다발을 받아 들었고, 남자가 돌아간 뒤에도 한참이나 그 자리에 불편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는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파란색 꽃에 코를 갖다대고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무슨 향이 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온실을 가득 채운 빨간 꽃의 향 때문에 파란 꽃의 향을 제대로 읽어내기 어려웠다. 여자는 온실 밖으로 나온다. 어느 새 주위는 어두워져 있고, 풀잎에 맺힌 밤이슬이 발목을 간지럽힌다. 잠깐의 한기를 버티기 위해 몸을 작게 웅크리고는 한 번 더 파란색 꽃에 코를 갖다댄다. 찌르르 찌르르 풀벌레의 울음 소리를 들으며 은은한 꽃향기를 맡는다. 파란색 꽃향기를.
상뻬의 그림책에는 삽화 밑에 짧은 문구가 몇 줄 달려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그걸 읽으면 상뻬가 어떤 마음으로 혹은 어떤 걸 표현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는지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말랑말랑한 상상을 한참 하고 난 뒤 정답을 맞추는 기분으로 그림책을 넘겨 봤는데.. 표지에 실린 저 그림은 본문에 실려 있지 않았다. 상뼤가 저 그림에 어떤 주석을 남겼는지는 알 수 없게 되었으니 나는 그냥 내 버전의 말랑말랑한 상상을 음미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