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링공과 북극곰

마음에 찾아온 빙하기

by 둥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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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에 커다란 볼링공이 하나 있다.


나는 그 볼링공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들고 있다. 까딱 잘못해서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마음에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생길 것이다. 그럼 밝고, 즐겁고, 웃음이 나는 모든 것들이 그 구멍으로 빠져나가겠지. 비틀즈의 fixing a hole을 백번 천번 불러봐야 소용없을 테고. 그것만은, 그러니까 마음에 블랙홀이 생기는 것만은 막아보겠다며 이렇게 안간힘을 쓰고는 있지만 이미 내 마음 속 시공간은 왜곡되어 있다. 이 볼링공은 그 정도로 무겁다.




나를 향해 달려오는 말들의 궤적이 휘어진다. 분명 똑바로 달려오던 말들도 내 마음의 중력권에 접어들면 비틀대기 시작한다. 거칠게 날뛰는 말들은 내 마음 여기 저기 발길질을 하며 상처를 남긴다. 그걸 몇 번 겪다 보면 누군가를 향해 내 말을 보내는 일도 선뜻 할 수 없게 된다.

무해한 소통을 상상할 수 없는 난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입을 다물기로 한다.'라고 쓸 수 있다면 그나마 나았을 지도 몰라.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나는 더욱 외롭다. 외로운 마음은 몹시 춥다. 이야기 되지 못한 마음은 건네지 못한 말이 되어 눈처럼 쌓여 간다. 그렇게 눈이 조금씩 쌓이다 보면 가장 아래 쪽에 쌓여있던 눈은 결국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어느 순간 얼음이 된다. 한 번 얼음이 되어 버린 마음은 좀처럼 녹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그렇다.

밤이 되면 뭔가가 부러지고 압축되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그건 내 마음 속에 쌓인 눈이 조금씩 빙하로 변해가는 소리다. 이 얼음들을 녹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온난화가 필요해, 더 많은 온실가스가 필요해, ...'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역시 잠을 잘 수 없다. 불면의 밤에 나는 내 마음 속에 사는 북극곰 대표를 불러낸다.


나 : 요즘 어때?
곰 : 살기 좋죠. 서식지도 계속 넓어지고 있고요.
나 : 미안한데 이전 수준으로 빙하를 좀 줄여도 될까?
곰 : (네가 정말 그걸 할 수 있겠냐는 눈빛으로 나를 본다)


간혹 이렇게 무자비한 성격의 북극곰이 호출될 때가 있다. 그럴 땐 '가급적 상냥한 곰'이라는 설정을 덧붙여서 다시 한 번 불러내본다.


나 : 요즘 어때?
곰 : 저희야 살기 좋죠. 근데 좀 춥지 않으세요? 마음에 담고 있기엔 너무 큰 빙하 같은데..
나 : 응 그래서 말인데 이전 수준으로 빙하를 좀 줄여도 될까?
곰 : 그럼요. 괜찮아요. 어차피 사람 마음에는 한 조각의 빙하 쯤은 늘 있는 법이잖아요. 저희는 그거면 돼요.
나 : 고마워. 근데 솔직히 자신이 없어. 어쩌면 앞으로 빙하가 더 늘어날 지도 몰라.
곰 : 힘들면 볼링공 잠깐 내려놓고 스트레칭이라도 해보는 게 어때요?
나 : 그럼 당장 마음에 구멍이 날 걸.
곰 : 까마귀랑 까치는 견우와 직녀를 위해 오작교라는 걸 만들었다면서요. 저희가 어떻게든 버텨볼게요. 혹시 못 버텨서 블랙홀이 생기면 어때요. 우주가 이렇게 넓은데 설마 블랙홀 메워주는 존재 하나 없겠어요? 사람 마음 속 빙하에 사는 북극곰도 있는 판국에.


이 정도로 말이 잘 통하는 곰과 만난 날에는 비교적 개운하게 잘 수 있다.




예상할 수 있는 모든 사건 사고의 발생 확률을 50%로 계산해내는 것이 불안한 정신의 특징이다. 육교를 걷다가도 무너지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나는 건, 플랫폼에 서 있는 나를 누가 밀치면 어쩌지 무서우지는 건, 한 무리의 비둘기가 나를 향해 돌진해 올 것 같은 건, 옥상에서 투신한 사람이 금방이라도 내 앞에 떨어질 것 같은 건, 전부 불안한 정신 때문이다. 그래서 불안한 정신일 때는 모든 것이 스트레스다. 생각을 많이 하면 할 수록, 내가 마주칠 수 있는 사건 사고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내면 낼 수록 정신이 피폐해지기 때문이다.

주로 사건사고의 영역에서 모습을 드러내던 이 불안함은 이제 관계에도 모습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고 계산을 하려는데 직원이 갑자기 내 따귀를 때리며 화를 낼 확률은 어느 정도 될까? 각별한 친구에게 날도 추운데 잘 지내냐고 연락했는데 그 친구가 '얘는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이쯤되면 그냥 연락을 말아야지 짜증나게 계속 연락하네'라고 생각할 확률은 어느 정도 될까? 건강한 정신은 그 확률을 0에 수렴하는 값으로 계산해 낼 테지만 불안한 정신은 그 확률 역시 50%로 계산해낸다. 이런 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득 잘 지내는지 안부가 궁금한 사람에게도 가볍게 연락하지 못하고, 어쩌다 나와 똑같은 외로운 마음을 만나도 먼저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한다. 가볍게 안부도 묻고, 내 나름의 위로도 전하는 건 마찰이 없는 빗면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불안한 정신은 그렇게 오늘도 투덜댄다.




오늘 밤엔 자상한 북극곰 불러내서 같이 놀아야지. 마찰이 없는 빗면에서 미끄럼틀이나 실컷 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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