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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추도사 Dec 28. 2022

등산하다 생긴 초능력

북한산 '영봉 코스'의 진달래 터널

주연언니가 알려준 북한산 영봉코스, 통상 등산 비수기인 11월에 갔지만 절경이었다.


등산을 시작하고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마법이 생겼다. 등산 친구 주연언니가 초겨울 북한산의 영봉길로 이끌었다.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계절, 언니는 산중턱 즈음 한껏 들떠 말했다. ‘봄에 오면 이 길에 진달래가 만개해. 위로는 자줏빛 터널이 만들어지고 양옆으론 꽃길이 생겨’ 앙상한 가지를 보면서 진달래가 만개한 길을 상상했다. 정말 아름답겠다. 상상에 젖어있는데 또 설레어한다. 뒤로 보이는 불암산, 수락산의 산맥을 보라고. 이런 절경은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며 포즈도 취하라고 주문했다. 뒤돌아서자 한복의 치마 주름처럼 빳빳한데 굴곡진 선들이 굽이굽이 이어져 절경을 이뤘다. 앙상한 가지를 보면서 진달래 터널을 상상하고, 눈앞의 산맥을 경이로워하는 사람을 곁에 두니 보이지 않던 게 보였다.


모든 생명체가 소강하는 11월부터 3월까지 서울과 아랫지방 산엔 볼거리가 없다고 말한다. 서울의 산은 강원도의 산과 달리 겨울산의 특징인 상고대와 흰 백의 풍경을 보기 어렵다. 그래서 등산객이 적다. 하지만 모든 계절, 여러 산을 고르게 겪고 나니 산은 계절에 상관없이 저마다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다. 겨울이 시작되면 여름의 풍성함과 가을의 화려함이 내려앉고 서울을 품어주는 산줄기가 또렷이 보인다. 북한산 영봉에 오르면 서울을 아름드리 안고 있는 불암산~수락산~사패산~도봉산~북한산의 굵은 산줄기와 병풍 같은 바위가 먹빛으로 물든 것을 볼 수 있다. 불~수~사~도~북 산맥이 겨울에 내뿜는 검은빛은 영엄해 엄숙해진다. 그 산맥 아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서울이 있다. 그런데 겨울, 그곳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면 참 고요하고 포근한 마을 같다.


예년보다 빠르게 눈이 오고 기온이 급격히 낮아져 추위로 고생인 요즘이다. 대설(大雪)엔 함박눈이 내려 서울 산들을 하얗게 뒤덮었다. 그날 감기에 걸려 비실비실 앓아누웠지만 눈이 많이 오면 이듬해 풍년이 든다는 속담을 알고 있기에 반갑고 설렜다. 그날 아침 신문엔 내년의 세계 경제를 최악으로 전망했고 백수이기에 그 뉴스를 진지하게 읽었다. 하지만 하얀 눈 덮인 서울 산을 보면서 내년엔 어떤 아름다움이 풍성하게 벌어질지 설렜다. 경제가 어찌 되더라도, 내인생 한치앞 몰라도 산속은 풍년이겠구나. 영봉거리에서 진달래 터널을 만끽하고 꽃을 따서 화전(花煎) 부쳐먹는 사치를 상상했다.


북한산의 영봉 길을 소개해준 언니의 나이는 오십줄이다. 하지만 정말 나이는 숫자다. 매주 산길을 해치고 다니고, 자연 앞에서 감정을 마음껏 분출하는 걸 보면서 이십 대때 회사에서 불꽃처럼 일했을 모습을 상상한다. 5년 뒤에도 산 어드매 꽃 앞에서 귀여운 포즈를 짓는 상상을 한다. 무엇보다 지금 친구에게 줄 도시락을 정성스레 싸 오는 다정한 모습이, 튼튼한 두 다리로 정상에 올라 ‘퐌타스틱!‘을 외치는 모습이 귀하고 사랑스럽다. 언니는 내년엔 산에서 또 어떤 아름다움에 전율을 느끼고 있을지 궁금하다.


겨울에 등산 모꼬지를 꾸려서 친구와 등산을 하면 마음속 깊은 이야기가 나온다. 화려한 볼거리가 없는 서울산을 걸으면 대화에 집중된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 아쉬움이 가득한 사람이 많다. 허송세월 한 거 같아 자존감이 낮아거나, 한해 내내 노력했는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아쉬움과 체념이 묻어있다. 그때마다 진심을 담아 말한다. 정상에 올라 안전하게 잘 내려온 체력, 함께 나눠먹을 음식도 챙겨 오는 따스한 마음, 뒤쳐진 친구를 기다리며 같이 걷는 다정함이 있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거라고. 당장 원하는 걸 얻지 못했지만 계절 함께 산을 오른 친구의 미래가 기대가 된다. 순진한 생각 같지만, 난 믿는다. 3년 넘게 산 저마다의 아름다움과 모든 계절의 아름다움을 목격했으니깐. 그 속을 거닌 우리도 그럴 거다.


주연언니의 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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