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은 온몸의 감각을 살리는 일
등산하고 내게 꼬리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 쾌청한 공기, 사방팔방 계절로 뒤덮인 풍경을 보면 엉덩이를 씰룩씰룩 흔들게 된다. 고단한 등반길 숨 넘어 가 심장마비 오는 줄 알았는데 조망이 터지자 엉덩이 끝 뿅 하고 무언가 쏟아 올라 살랑살랑 흔드는 기분이 들었다. 궁댕이가 하늘위로 두둥실 오르는 기분이 들고 갑자기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며 달리고 싶다. 등산은 인간에게도 여전히 꼬리가 살아있다는 감각을 알려준다.
산에서는 귀가 쫑긋 펼쳐진 토끼가 됐다가, 입에 넣는 데로 맛있게 해치워버리는 하이에나가 되기도 한다. 혼자 등산을 하면 사방팔방 아무도 없다 보니 무서움이 커져 귀가 예민해진다. 갈대 사이에 부스럭 대는 소리에 뱀이나 토끼가 있을까봐 귀를 쫑긋하게 된다. 한국의 뱀들은 엄지 손가락 두께 정도 되는데 그 작은 미물의 소리를 듣게 된다. 도시에서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귀가 먹먹해지고, 이어폰 볼륨이 너무 높아 ‘청력 상실'주의 경고를 받지만 산에선 다람쥐가 나무를 타는 소리도 잡아낼 정도로 토끼처럼 귀가 커진다.
뭍에선 혀가 까다로운 인간인데 산에서는 이름 모를 아저씨가 주는 초콜릿도 넙죽 잘 먹고, 찌그러져 물이 흥건한 김밥도 꿀떡꿀떡 잘 삼킨다. 친구들은 산에서의 식성을 보고 기함을 토한다. 다이어트 식단이니 유기농이니 따져가면서 먹고, 스트레스에 입맛이 자주 떨어져서 잘 먹질 않는데 산에서는 게걸스럽게 다 먹어치운다. 그냥 다 맛있다. 올해 산에서 가장 맛있게 먹은 건 당도가 떨어진 샤인머스캣. 냉장고에 버려질 날만 기다리는 샤인머스캣을 태백산 정상에서 먹었다. 세상에나. 입안에 넣는 순간 과즙이 팡 터지고 눈앞에는 청량한 여름 하늘이 펼쳐지니 내가 여름이 된 거 같았다. 그때도 궁댕이에서 날개가 튀어나서 훨훨 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산은 오감을 넘어 몸 전체가 더듬이란 걸 알게 한다. 도시에서는 손가락 끝과 시각만 쓰는 단세포 생물이다. 어딜 가기 위해서는 손가락과 눈만 있으면 됐다. 길 찾기 앱에서 출발/도착지를 검색하면 최적의 경로로 도착 예정 시각까지 알려준다. 주변을 살피지 않아도 모바일 화면의 2차원의 길을 따라가면 된다. 등산은 그렇지 않다. 들머리(등산의 시작점)에 들어서는 순간 사방팔방 모든게 길이다. 길 찾기 앱도, 블로그의 등산길 안내 게시물도 무용지물이다. 내 길을 찾으려면 수십 가지 감각을 동원해야 한다. 산길은 낙엽이나 눈으로 뒤덮여 있어서 주의 깊게 아래를 살피고 저 멀리 정상을 봐야한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으면 인기척을 듣기 위해 귀를 열어야 한다. 등산 초보자 시절 길을 정말 잘 잃어먹었다. 서울에서만 한평생 살아 감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산에서는 인간의 특별한 감각도 한껏 살린다. 바로 질문하고 표현하는 것. 표지판도 없고, 길도 보이지 않는데 가려는 길이 이 길이 맞는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면 꼭 등산객이 나타난다. 다짜고짜 물어보고, 너무 힘들어서 숨이 넘어간 채로 우는 소리를 한다. 도시에서는 아무에게나 추궁하고 찡찡거리지 않는다. 헌팅도 해본 적 없지만 길을 잘못 들어 식량 부족으로 허기졌을 때, 아저씨들 앞에서 애교 부리고 불쌍한 척해서 김밥을 적선받았다. 여름 등산에선 물이 다 떨어지고 탈수직전이 돼, 또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애원했다. 돈만 있으면 뭐든 살 수 있는 도시에서 쓰지 않는 감각이다. 등산을 하다 보면 인간은 질문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동물이라는 걸 깨닫는다. 생존하려면 이 감각들을 살려야 한다.
추운 겨울, 이 날씨에 산을 간 건 미친 짓이라고 말하지만 지난 주말엔 청계산을 갔고 이번 주말에는 월출산에 간다. 겨울산에 가면 당근이 된다. 겨울 산의 땅은 어느 계절보다 딱딱하고 척박하다. 차고 강한 바람는 온몸을 감아 휘청거린다. 그래도 열 발가락으로 땅을 꽉 움켜쥐고 한걸음 한걸음 나아간다. 모진 겨울 척박한 땅의 기운과 거친 바람을 견뎌내는 당근의 마음을 이해한다. 신기하게도 그 추운 날씨에 등산을 하면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이불속에 있을 걸'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집으로 오는 길 단전에서 딴딴한 에너지가 솟구쳐 오른다. 인간이 등산 하다가 달디 단 겨울 당근이 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