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잘렸고, 카페일 하는데요?

7년 차 직장인이 '카페'에서 배우는 것들

by 배추도사
나의 소중한 직장

인생이 참 농담 같다. 직전회사에서 잘렸고, 5개월 만에 직장을 구했다. 광화문의 커피빈이다. 주변에선 '서른세 살에 잘리고 아르바이트한다'로 커리어를 요약한다. 32살에 회사에서 잘릴 줄은 몰랐고, 커피와 빵, 단 음료를 거의 안 먹는데, 카페에 일하게 될 줄이야. 게다가 기자로 일할시절 커피빈의 고용형태에 관해서 고발 기사를 썼다. 그 기사가 네이버, 다음 포털사이트에 주요 기사로 올라가 댓글이 수백 개가 달렸었다. 당시 일주일 내내 커피빈 직원과 전화로 날 선 말을 주고받았는데, 그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니 인생이 참 농담 같다며 속으로 낄낄거린다.


직전 회사에서 마케팅 일을 하다가 잘렸지만, 생각해 보면 은연중에 나도 일을 밀어냈다. 마케팅과 콘텐츠 제작 경험이 7년이 됐지만, 새로운 것이 하고 싶었다. 특히 세일즈가 하고 싶었다. 입사는 세일즈로 했지만 처음이라 정말 못했고, 다시 마케팅을 맡았다. 회사에 남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했더니 '마케팅'이 아닌 모든 일이 재밌어 보였다. 세일즈는 물론, 오퍼레이션과 경영에 관심이 생겼다. 돈 받고 일하면 응당 맡은 일에 집중해야 하는데, 마음은 계속 다른 곳을 곁눈질했다. 그러다 번아웃을 겪고 여차저차 잘린 것이다.


직장 생활 6년 대부분 일이 재밌었다. 직장에서 성과를 내고, 동료들과 사소한 일상을 채워가는 게 즐거워서 일요일마다 설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번아웃을 겪고 잘리게 된 건지 어리둥절했다. 잘렸으니깐 얼른 좋은 회사에 취직해 명예 회복 하려고 채용 공고를 봤는데 설레지 않았다. 마케팅이 싫은 게 아니다. 이 세상엔 마케팅 말고도 정말 재밌는 게 많은데 그걸 제쳐두고 한 우물만 들여다 보기 싫었다. 그런데 또 막상 나이 서른셋에, 누군 연봉 2억이네, 보너스를 얼마 받았네 하는데 다짜고짜 그럴듯한 회사에 가서 '저 세일즈 하고 싶은데 시켜만 주세요! 연봉은 처음이니깐 적당히 3500만 원 받을게요’ 이러면 반기는 데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커리어를 생각할수록 골 때리는데, 뭘 원하는지도 모르겠는 겨울이었다.


그 와중에 식욕은 살아있어서 달달한 겨울 시금치가 당겼다. 문득 돈도 안 버는데, 직접 따다 먹을 겸 훌쩍 남해 두모마을에 여행을 갔다. 농부 할머니 할아버지는 정말 부지런했다. 새벽 5시부터 시금치를 케고, 하루종일 솎아 내는 일을 했는데 정말이지 돈을 못 벌었다. 최저임금도 안 나오는 마이너스 장사. 그런데 농부들의 얼굴은 맑고 건강했다. 서울 아가씨는 시금치도 잘 못 따면서 노동시간 대비 수익이 얼마니, 시금치 먹었는데 살이 하나도 안 빠져서 상품성이 별로라며 허튼 계산을 하고 있었는데, 밭에 농부들은 셈하지 않았다. 그냥 일했다. 아직 몸이 멀쩡하고 밭이 있으니깐. 5개월 내내 '번아웃'타령을 하며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시금치 밭에서야 정신이 들었다. 사지가 멀쩡하고 서울엔 일자리가 많으니 하고 싶은 일이라면 연봉이고 뭐고 따지지 말고 하겠노라고. 서울에 올라와 당근마켓의 알바를 뒤져 이력서를 뿌렸다.


괜찮은 직장, 7년 짬밥이면 파트타임 자리 하나정도는 뚝딱 구할 줄 알았다. 조건은 간단했다. 세일즈와 오퍼레이션을 맛볼 수 있는 곳이면 다 뿌렸다. 옷가게, 가구/액세서리 편집샵, 개인 카페 등등 스무여 곳을 뿌렸지만 연락도 가뭄에 콩 나듯 났고, 막상 면접을 봐도 '곧 직장 구해서 짧게 일하다 가는 거 아니야?'라는 의심과 '알바를 하신 적이 없네요'란 핀잔만 듣다가 왔다. 그런데 그런 나를 받아준 단 한 곳이 바로 커피빈이었다. 합격 전화를 받았을 때 정말 신났다. 정말 감사하다며 레시피도 외우고, 서비스 교육도 들었다. 이직을 두 번이나 했는데, 첫 출근 전날 설레어서 잠이 오지 않았다.


한때 카페일을 저임금에 단순 노동으로 치부했다. 어릴 적 알바 하나 안 하고 곱게 자란 걸 자랑처럼 여겼다. 하지만 서른세 살에 알바를 하면서 지난 직장들이 주지 못한 새롭고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아예 새로운 감각을 쓰고, 또 새로운 환경을 맞닥뜨리며 시야를 넓히고 있다. 요즘은 늦은 아침 카페에 들어와서 두서없이 아무 말을 하는 아줌마, 할아버지의 주문을 듣는다. F&B시장의 메뉴 발전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들에게 알기 쉬운 말로 맛을 설명하고, 자주 할인을 명목으로 끼워 팔기도 해보고 있다. 내 말 하나 믿고 사가면 뿌듯하다. 지금 세일즈를 하고 있으니깐. 아침 8시 30분부터 수십 명의 직장인들이 커피와 빵을 주문하는데 어딘가가 느려지면 왜 그런지 기록을 하고 프로세스 개선을 하고 싶어서 점장님에게 대안을 전달한다. 프로세스가 바뀌지 않지만 행복하다. 오퍼레이션을 하고 있으니깐.


어렸을 적 '나는 커서 무엇이 될까'궁금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서른세 살에 나는 4시간 카페 파트타임을 한다.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며 성장하고 있는 나를 보니 어렸을 적 설렘이 헛되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난 3개월 뒤, 1년 뒤 무엇이 될까' 기대된다. 경영자가 됐다가, 세일즈를 했다가, 또 마케팅을 하는 일을 상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보고 싶은걸 조금 했으니 다시 마케팅을 하면 더 잘할 수 있겠다 싶다. 무엇보다 연봉, 지위, 다른사람의 시선을 따지면서 복잡하게 계산하지 않고 오롯이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몰두하는 지금이 좋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 있을거 같다.


처음 POS기계 앞에 섰던 날이 기억난다. 5개월 내내 집에서 팽팽 놀아 사회감각이 사라진 상태였다. 인사말을 더듬었고 주문받는 게 서툴러서 아침 한시가 급한 직장인들이 초조하게 바라봤다. 주문을 잘못 받아서 음료 제조 과정이 다 꼬여 선배 바리스타들의 원성을 샀다. 그런데 지난주엔 어떤 아주머니가 방긋 웃으면서 말해줬다. '저번에 추천해 주신 거 맛있더라고요'. 아무리 광화문 몫 좋은 자리라지만 아침 매출 80%는 단골에서 나오기 때문에 단골을 챙기는 게 정말 중요한 일이다. 정문에서 단골손님이 보이면 디폴트 메뉴와 결제 수단까지 다 외워서 미리미리 포스기에 찍고 있으니 무표정으로 들어오던 분이 '어머 고마워라, 편해서 매일 와요'라는 말을 들었다. 작은 한마디지만 직장인 7년 차에 얻은 귀중한 성과다. 무엇보다 다시 일이 정말 재밌고, 잘 하고 싶어서 노력하는 요즘이다.

농부 할아버지와의 농도 깊은 대화를 오래오래 기억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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