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인지 정말 궁금했어요."
S와 마주 앉은 H의 첫인사는 이러했다.
처음 만나는 인사말 치고는 제법 날카로움이 배어 있는 인사.
어리둥절한 S의 표정과 달리
그 뒤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2주 전 토요일.
S의 전화기가 계속해서 울려댄다.
주말을 맞이하여 제법 먼 곳으로 나와있던 차에 모처럼의 휴식을 깨며 울려대는 전화기를 외면하고도 싶었지만 끊기는 듯 또 이어지는 전화벨에 결국 통화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여보세요"
"엉, 난데. 왜 이리 전화를 늦게 받냐?"
목소리의 주인공은 같은 과이자 같은 동아리 선배였다.
"아. 네... 그런데 무슨 일..?"
S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선배의 말은 빠르게 이어진다.
"지난번에 얘기했던 소개팅 말이야. 오늘 2시로 잡았다. 학교 앞 M으로 와. 니 이름만 알려줬어.
니들끼리 만나는 거니깐 잘 만나고"
일방적으로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멘트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결론을 내 버린다. 시계를 보니 정확히 12시.
지금 당장 출발한다 해도 빠듯한 시각이기도 한 데다 이제 막 도착한 곳에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배. 저 지금 인천이에요.
갑작스레 이리 약속을 잡으면 곤란해요. 오늘은 안될 거 같은데요."
"안되는데. 그 녀석 벌써 약속 장소로 가고 있을 텐데"
"선배. 저 오늘은 정말 곤란해요. 친구분께 연락 드려주세요"
사람을 소개하고 받는 일이 가벼운 일도 아니고,
예고도 없이 2시간 전 갑작스레 전화로 나오라는 것도 당황스러운 데다 상대는 이미 약속장소로 가고 있다니.. 기억도 안나는 언젠가 지나가는 듯 이야기했던 소개팅을 이렇게 한다고? 것도 내 첫 소개팅을?
S는 이 소개팅은 애초에 성사될 것이 아니었다고 마음을 접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 후로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당연히 선배가 친구에게 연락을 했으라 생각했고, 이미 나선 그 친구는 다시 발걸음을 돌렸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예상대로 되지 않았던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음을 마주 앉은 그 사람의 눈빛과 말투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날, 세 시간 동안 기다렸습니다."
H의 이어진 말에 S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잔을 놓칠 뻔했다.
선배가 당연히 취소 연락을 했을 거라는 안일한 믿음이 보기 좋게 깨지는 순간이었다.
"세 시간요? 분명 그날 선배한테 안 된다고, 못 간다고 말씀드렸는데..."
"글쎄요, 저한테는 '그쪽이 오고 있는데 차가 많이 막힌다고 조금만 기다려달라'라고 하더군요. 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고요."
H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는 비난이라기보다는, 그날의 허탈함을 갈무리하려는 자조에 가까웠다.
2주 전, 엇갈린 오후
S가 인천의 바닷가에서 선배의 전화를 끊고 휴식에 집중하고 있던 그 시각, 학교 앞 M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있던 H는 줄어드는 커피 양을 보며 시계를 확인하고 있었다.
10분, 30분, 그리고 한 시간. H는 평소 무례함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오기가 발동했다. 친구가 호언장담하며 소개한 'S'라는 사람이 대체 어떤 대단한 인물이기에 이토록 사람을 기다리게 만드는지, 끝까지 확인해보고 싶다는 고집이 생겼던 것이다.
결국 세 시간이 지나서야 친구로부터 '미안하다, 연락이 잘못 전달됐다'는 문자를 받았을 때, H는 화가 나기보다 허탈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 무책임한 상황의 주인공인 S를 언젠가는 꼭 직접 만나서, 그날 내가 버린 세 시간의 가치가 어떠했는지 눈으로 확인해 주겠노라고.
오기와 오기가 맞닿은 지점
"그래서 선배에게 요청했나요? 다시 자리를 만들라고?"
S가 미안함과 당혹감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네. 처음엔 따지러 나올 생각이었죠. 그런데 막상 오늘 마주 앉고 보니, 그쪽 표정이 제가 생각했던 안하무인과는 거리가 멀어서 좀 당황스럽네요."
H는 팔짱을 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날카롭던 눈매가 아주 조금 유연해졌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선배가 취소했을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 비하인드가 있을 줄 알았다면 진작 제가 직접 연락이라도 취했을 텐데 말이죠."
평소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 싫어하는 S 역시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선배의 잘못이 컸지만, 자신을 확인하러 나온 사람 앞에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할 것 같은 이 상황과, 이를 확인하려는 H의 태도가 도전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H님, 그래서 궁금증은 좀 풀리셨나요? 세 시간을 기다려서 확인하고 싶었던 그 실체가 저인데?"
S의 질문에 카페 안의 공기가 다시 팽팽해졌다. 미안함은 미안함이고, 초면에 날을 세우고 들어온 상대에게 무조건 숙이고 들어갈 마음은 없었다.
H는 잠시 S를 빤히 바라보다가 낮게 읊조렸다.
"아직은요. 한 번의 만남으로는 그 세 시간이 아까운지 아닌지 결론 내리기 어렵겠는데요.
어때요, 오기로 이어진 이 만남을 조금 더 연장해 볼 생각 있어요?"
S는 잠시 침묵했다. 상대의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어디 한번 나를 설득해 보시지'라는 식의 도전적인 뉘앙스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 시간을 기다렸다는 그 미련할 정도의 고집이, 어쩌면 자신과 닮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동질감이 스쳤다.
"연장이라... 보상 차원인가요, 아니면 저라는 사람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인가요?"
S가 찻잔을 만지작 거리며 되물었다.
H는 깍지 낀 손을 탁자 위에 올리며 상체를 살짝 앞으로 숙였다.
"둘 다라고 해두죠. 그런데 아까부터 차는 한 모금도 안마시고 있는데, 제가 너무 몰아세웠나요?"
S는 아차 싶어 잔을 바라봤다. 정말 그랬다. 소개팅이라는 만남의 자리에서 가해자로 변한 듯한 분위기에
당황한 것은 분명했다. 대학 새내기 첫 소개팅인 데다, 지난번 만남이 틀어졌던 상대가 다시 나오리라 생각을 못한 것을 속으로는 자책하고 있었던 차였다. S는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려는 듯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온기를 잃어 씁쓸한 맛이 혀끝을 자극했다.
갑자기 치고 들어온 H의 말에 할 말을 빼앗긴 채, 찻잔만 바라보는 S의 모습에 머쓱해진 건지 안쓰럽게 느낀 건지 H가 다시 말문을 연다.
"장소를 좀 옮길까요? 여기서 지난번 세 시간의 보상을 받기에는 공기가 너무 텁텁하네요."
두 사람은 카페를 나섰다.
2주 전 한 사람은 인천의 바다에서, 한 사람은 학교 앞 카페에서 각자의 오기를 불태웠던 그 오후처럼 햇살이 따가웠다. 길을 걷는 내내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적막과 간헐적인 질문들이 오갔다.
전공, 취향, 그리고 그 문제의 선배에 대한 험담까지..
"그런데 H님,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정말 세 시간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기만 했어요?"
H가 멈춰 서서 S를 한참 바라보았다.
"아뇨, 책을 한 권 다 읽었죠. 제목이 뭐였는지 알아요?"
"글쎄요, '인내의 기술' 같은 건가요?"
S의 농담에 H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날카롭던 눈매가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며 공기가 한순간에 말랑해졌다.
"아니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날 S님을 기다리며 그날의 상황에 딱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보니 제목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어떻게요?"
"그건 오늘 저녁까지 같이 있어 보면 알려주죠."
S는 못 이기는 척 걸음을 옮겼지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기로 시작된 만남이 어느덧 서로의 결을 맞추어가는 산책이 되어가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은 고통이었을지 몰라도,
그 시간을 보상하고, 받기 위해 내딛는 두 사람의 발걸음은 제법 가벼웠다.
다분히 의도적이지만 계속되는 날카로운 일정의 고단함을 녹여줄, 말랑말랑한 이야기가 필요했습니다.
소설은 애정하는 장르가 아니지만 '직접 써볼까?'라는 겁 없는 도전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네요.
그래서 시작된 글입니다.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있다'라는 운명론적 이야기를 넘어
어떤 만남은 '오기로 시작되기도 한다'는 생각을 해보았네요.
'사랑하기 좋은 계절'에 취해 끄적거린 첫 글이기에
다음을 연재할는지도 확실히 장담은 하지 않으렵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HP4LIXkiNqE&list=RDHP4LIXkiNqE&start_radio=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