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아와의 외출이 두려웠습니다.

by 배즐성
신생아는 면역력이 약하여
바이러스의 감염이 우려되므로
아이와의 외출은
최소 100일 이후에 해야 한다.

첫째를 낳고 다음 해에 둘째를 낳았다. 출산이 그리 힘들지는 않았지만 육아는 달랐다. 아이 둘을 함께 케어하는 것은 고난도였다. 자녀의 수가 0에서 1이 될 때의 충격보다는 1에서 2가 될 때의 혼란과 혼돈이 급격히 컸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2배가 아니라 4배쯤 일어났다. 한 아이는 이제 막 걸어 다니기는 하지만 아직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둘째는 모유 수유를 하고, 첫째는 일반 유아식을 먹었다. 호기심이 많은 첫째는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사고를 쳤다. 둘째를 향한 첫째의 시샘을 줄여보려고 첫째 앞에서는 둘째를 향해 예쁘다고 말하는 것도 쓰다듬는 것도 자제했다. 그렇게 우리 네 가족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둘째가 태어난 지 2주쯤 된 어느 날, 친정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건강검진을 했는데 위암이 의심된다는 소견이 나왔고, 한 지방대학병원에서 위장의 일부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을 예정이라고 얘기했다.


연이어 말씀하셨다.

"아이가 너무 어리니까 오지 말고 집에 있어라.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지 말아라.

특히 시부모님께 말하지 말아라"

제대로 입단속을 하셨다.


난 너무 당황하고 속상했지만 엄마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남편에게만 살짝 얘기하고 시부모님께는 전달하지 말아 달라고 얘기했다.


수술 전에 친정엄마를 찾아뵙고 싶었다. 친정도 최소 3시간은 가야 하는 짧지 않은 거리라서 신생아를 데리고 가기 부담스러웠다. 아이와의 외출은 100일 이후에 해야 한다는데 한 달도 되지 않은 아이라 외출을 오랫동안 하게 되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분유를 먹이라고 하고 혼자 다녀올까도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남겨진 아이는 엄마가 갑자기 없어져서 혼란이 가중될 것 같았다. 출산휴가를 마친 지 얼마 안 된 남편에게 맡기고 가기도 부담스러웠다.


친정엄마의 말처럼 위장을 절제하면 별일이 없을 테니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검진에서 빨리 발견되었기에 수술하면 충분히 나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수술 당일, 시어머니가 나의 산후조리를 위해 집에 와 계신 상황이었다. 수술 시작 시간은 다가오는데 난 점점 초조했다. 시어머니께 현재의 상황을 말씀은 못 드리고, 내 얼굴은 자연스레 찌푸려지고 심각해졌다.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간절한 기도뿐이었다.


표정관리를 해야 했기에 억지로 울음을 참았다. 수술 전에도, 당일 날도, 그 이후에도 가보지 못하는 내 처지가 안타깝고 불쌍했다. 함께 할 수 없음이 가슴 아프고 답답했다.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방에 들어가 소리 없이 울었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조절은 되지 않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눈물 흘리면서도 어떻게 울지 않은 척하고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거실로 나갈지 고민했다. 시간은 흘렀고 수술이 잘 됐다는 얘기만 전해 들었다. 160cm도 안 되는 키에 몸무게 58kg인 몽실몽실했던 엄마는 수술 이후 빠르게 말라갔다.




나는 엄마 말을 잘 듣는 편이 아니다. 나 잘났다고 내 맘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를 잘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순순하게 엄마의 말에 순응했다. 좀 더 내 의견을 피력해도 됐었는데 왜 내가 가보지도 않았는지 후회가 컸다. 아이와의 외출은 100일 이후에 해야 하므로 밖으로 나가기를 엄두 내지 못했던 나를 책망했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영화 속의 한 대사가 떠오르며 나를 나무라는 것 같았다.


어린아이를 돌보면서는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힘들었다고 핑계를 대본다. 눈앞의 것을 해치우는데만 급급했다. 심지어 일주일 뒤, 한 달 뒤도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일로 엄마에게 빚을 지고 있는 느낌이다. 아이는 면역력이 약하더라도 가볍게 아프고 말 일인데 혹시 수술이라도 잘못됐으면 어땠을까 상상하면 아찔하다.


신생아와의 외출이 나는 왜 그토록 두려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