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며느라기였다. 엄마는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도 '새아가'로 불렸다. 아빠의 유일한 형제가 결혼하지 않아서 유일한 며느리였기 때문이다.
내가 이전에 적었던 글 중에 '매주 일요일 시댁에 가는 며느리'가 갑자기 브런치 조회수가 폭등해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사람들에게 이런 내용은 언제나 관심거리인 모양이다. 그만큼 아직도 며느라기들이 많은 걸까.
우리 집 며느라기는 매주 일요일마다 시댁에 갔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단 한주도 빼놓지 않고 말이다. 명절연휴에는 명절전날 시댁에 가서 명절음식준비를 도왔다. 명절당일에는 차례를 지내고 밥을 먹고 정리를 도왔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한숨 돌리려 하면 부지런한 어머니는 계속 무언가를 하고 계셨고, 남편은 어머님 뭐 하시지 않냐면서 빨리 가보라며 며느라기를 닦달했다. 정작 남편 본인은 드러누워 티비를 보면서였다.
남편은 피곤하다는 이유로 낮잠을 늘어지게 잤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남편은 마지못해 운전대를 잡고 처가로 향했다. 며느라기가 친정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형제들은 본인의 처갓집으로 향하여 얼굴 마주하기도 힘이 들었다.
며느라기는 출산, 건강상의 이유로 좋은 직장을 관두었다. 남편은 사업을 한다는데 돈을 많이 벌어오지 못했다. 도무지 뭘 하는지 물어도 자세히 이야기해 주는 법이 없었다. 당신은 말해도 잘 모른단다. 며느라기는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이었다. 잘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며느라기는 더 따질 수가 없었다. 더 물으려치면 성질을 내고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집밖으로 나가버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며느라기는 초등학생이 된 딸을 두고 일하러 나가야 했다. 맞벌이 가정이 되어도 바뀌는 건 없었다. 남편은 여전히 밤늦게 들어왔고, 집안일에 손도 대지 않았다. 먹다 남은 과자봉지를 널브러트려놓거나 옷을 여기저기 던져놓거나 밤12시가 다되서 들어와 밥 차려달라고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오히려 사업에 필요하다며 며느라기에게 돈을 요구했다.며느라기는 자격증이 있었으므로 며느라기에게 사무실을 차려주고 남편이 그 일을 돕는 게 합리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남자가 기가 죽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며느라기는 이런 신세에 대한 한탄을 말할 곳이 없었다. 며느라기는 딸에게 하소연을 하고는 했다. 아이는 아는지 모르는지 묵묵히 말을 들어주었다. 애가 뭘 얼마나 알겠는가. 말이라도 하고나면 터져나가는 속이 조금 나아졌다.
나는 이 '우리집 며느라기'가 아주 보편적인 줄 알았다. 왜냐하면 드라마에 며느리가 고생하는 이야기 불합리한 이야기가 나왔고, 티비나 인터넷에서 시집살이 고부갈등 그로 인한 부부갈등 같은 이야기들을 종종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결혼도 안 하고 아기도 안 낳을 거라고 은연중 생각했다.
이런 게 결혼생활이라면 나는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며느라기'가 되고 싶지 않았다. 며느라기였던 엄마의 역할은 내가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부터나의 역할이기도 했다. 이유는 '나중에 시집가서 시어머니에게 미움받는다'는 이유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