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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그루 Sep 24. 2024

돈 내고 고생은 이제 그만 - 유픽 대신 와플 주세요

밴쿠버 근교 랭리 여행


뭐든지 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과 굳이 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있다. 여러분은 어떤 쪽인가? 나는 전자에 가깝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블루베리를 직접 따 볼 수 있는 유픽(U-pick) 농장까지 가서 아쉬움 없이 체험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밴쿠버와 버나비 근교에는 랭리라는 동네가 있다. 동네라고 말하긴 땅덩어리가 엄청나게 넓긴 하지만. 도시보다는 한적하고, 너른 들판이 가득하고 아파트보단 단독주택이 더 많다고 느껴지는 곳이었다.

 삼촌과 숙모께서 최근 다녀오셨다는 한 농장에 도착했다. 예쁜 푸른색 집과 소담한 정원이 어우러져 있는 정겨운 곳이었다. 캐나다가 블루베리가 참 맛있다고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터라 기대가 많이 되었다. 무엇보다 가격도 훨씬 저렴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도 유픽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가 아니었지만 나 혼자 유픽을 떠올리며 고민을 시작했다.


블루베리 농장 체험을 하고 싶은가? - 네.

삼촌 숙모께서 뭐라고 하시던가? - 며칠 전에 유픽을 하러 갔었는데 싸지도 않고 햇빛 때문에 화상 입는 줄 알았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가고 싶은가? - 아니, 난 햇빛이 싫다. 그렇지만 체험을 해 보고 싶기도 하다.

시원한 블루베리 농장은 없는가? - 없다. 농장은 땡볕에 있다.

좀 시원할 때 나중에 체험해 보는 건 어떤가? - 블루베리는 뜨거운 땡볕에서 가장 맛있다.


 유픽 바구니와 가격표가 눈에 들어오자 치열한 고민이 언제 그랬냐 싶게 김이 빠져버렸다.

제일 싫어하는 햇빛을 정통으로 맞으면서 노동력을 쓰는데. 생각과는 다르네? 머릿속에서 사정없이 굴러가던 계산기가 멈췄다. 남이 따 준 블루베리를 맛있게 먹으면 몸도 편하고 시원한데, 계산할 가치가 있나? 솔직히 가장 큰 바구니 정도면 본전을 뽑을 수 있겠다는 일말의 아쉬움이 스쳤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아쉬움 또한 유픽 스몰 박스 정도만 했기에 아쉬움을 털고 이동했다. 그러면서도 새삼 든 생각. 이제 무작정 경험하는 걸 좋아하는 나이가 지났구나. 그래서 젊을 때 고생은 사서 한다는 건가?

난 이젠 고생 말고 편리함을 사고 싶다!


 아직 뜨거운 날씨였지만 그늘을 만들어 놓은 안쪽 공간은 불쾌하지 않을 만큼 적당히 더웠다. 매일매일 토핑을 바꾸면서 ‘오늘의 와플'을 판다고 했는데, 오늘은 다행히 내가 따는 대신 사 먹기로 한 블루베리가 토핑으로 올라간 와플을 파는 날이었다.

배가 불렀으므로 넷이 와플을 한 개만 주문했다. 난 블루베리 100퍼센트 주스도 같이 골랐다. 맛은…. 내가 블루베리 한 통을 사서 주먹으로 꾹 누른 다음에 바로 주먹을 맛보면 날 것 같은 바로 그 맛이었다. 밍밍한 듯하면서 은근히 간이 있고, 은근히 달고, 꾸밈없는 맛. 내 돈 주고 샀고 내가 부자였다면 한 입 먹고 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삼촌께서 사 주셨고 나는 평범한 시민이기 때문에 주스를 두고두고 가져가서 결국 마지막 한 입까지 다 비웠다. 와플은 한 입 먹고 여느 와플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눈물 흘릴 그런 맛은 아니었지만 폭신하며 같이 나온 크림이 많이 달지 않으면서 신선한 맛이 가득해서 한 입 먹으면 그저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평범하고 익숙하고 예상할 수 있는 것이 때로는 더 적당한 순간이 있다. 예상보다 신맛이 나는 블루베리와 함께 달콤하고 포근한 시간을 보냈다.


 알고 보니 블루베리 농장은 이곳에서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고 하고, 이 장소에는 다양한 음식과 기념품 등을 팔고 있었다. 소담한 가게 안에는 농산물과 기념품을 파는 곳이 있었다. 익숙한 듯 모양이 미묘하게 다른 채소들을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숙모께서는 다른 곳에서 산 것이 맛이 없었다며 이곳에서 산딸기를 구매하셨다. 씻고 먹어야 한다지만 이 영롱한 자태를 보면 바로 손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블루베리 잼이나 주방용품을 좀 사고 싶었지만, 여행 2일 차인 탓에 간덩이가 충분히 붓지 않아서 조심스럽게 구경만 하다 따로 뭔갈 사진 못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정원에서 직접 뜯었다는 소담스러운 꽃다발이 만 오천 원밖에 안 해서 가져가고 싶었지만 나 말고 아무도 꽃을 원하지 않겠다 싶어 눈과 카메라에만 열심히 담고 이동했다.

 도시에서 많이 멀지 않아서 가족끼리 방문해서 유픽도 직접 해 보고 간식도 먹고 간단한 게임도 가족들과 같이하면 아이들에게 오늘 하루 잘 보낼 것이라고 확신했다. 예전에 딸기농장 같은 곳은 몇 번 간 적 있지만 농장이면 딸기만 열심히 따서 집에 가거나 구경한다면 잼 만드는 모습 정도만 구경할 수 있었는데, 이곳은 농장 자체를 예쁘게 꾸며놓고 가족끼리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는 장소와 정원을 감상할 수 있는 좌석 등도 마련해 놓고, 여러 가지 기념품도 같이 팔면서 이곳에 오는 것 자체가 농장 체험만을 넘어선 또 다른 가치를 줄 수 있도록 했다. 오랜 시간 머물지는 않았지만 여유롭고 따뜻하고 아기자기하고 예쁜 풍경을 보고 떠나 기뻤다. 언젠가, 내 주변에 작은 생명이라도 있어야 땡볕 아래에서 몸을 태우며 제값을 주고 고생하며 블루베리를 딸 마음이 들겠지?


P.S. 결국 블루베리는 농장이 아닌 동네 한인 마트에서 잔뜩 사 와서 곰처럼 매일 실컷 퍼먹었다는 후문이. 그리고 한인 마트 블루베리가 유난히 크고 달았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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