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그루 Sep 29. 2024

물만 보면 환장하는 사람들

컬터스 레이크(Cultus Lake), BC, 캐나다


 3주라는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잘 실감하지 못하던 여행 초기. 우리는 블루베리 와플 먹은 것만으로도 하루 일과가 끝난 양 만족하고 있었지만 삼촌은 서둘러 또 다른 장소로 우리를 데려다주셨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얼마나 봤을까, 집들과 농장들이 사라지고 몸에 붙은 이끼마저 나보다는 확실히 몇 배 더 살았을 것 같은 고릿적 나무들을 지나자 탁 트인 아름다운 호수가 드문드문 나타나기 시작했다. 광활한 호수가 햇빛을 반짝반짝 받아내 경탄을 자아내고, 사람들은 물속에 한껏 담겨 호수와 놀고 있었다.

컬터스 레이크였다.

 늦은 오후라 사람들이 붐빌 시간이 지났다 생각했지만 주차하기가 쉽지 않았다. 첫 번째, 두 번째 주차 및 감상 포인트를 지나 세 번째 포인트 정도에 가서야 간신히 주차할 수 있었다. 몇 층 건물보다도 높은 원시림이 호수 가는 길에 가득해 웅장하면서도 만족스러운 공간이었다. 주차장에서 한 무리 사람들이 트렁크에서 공기주입기를 꺼내 열심히 패들 보트에 공기를 넣고 있었다. 다른 사람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웃통을 벗거나 수영복을 입은 채 호수로 걸어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호수를 그저 멀찍이 감상할 장소로 방문한 우리와 사뭇 대조적이었다. 난 호수공원에 가든 영랑호에 가든 마장호수에 가든 그저 주변을 뺑뺑 도는 선택지만 있었는데. 이날도 호수를 보러 간다기에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는데.

다들 수영복을 입고 신나게 물에 들어가 수영하고 있었다. 다이빙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패들 보트를 타는 사람들도 있었다. 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수영과 수상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이런 큰 호수가 있다니 부러웠다(TMI: 캐나다는 호수 수가 2백만 개가 넘는다고 한다). 워터파크에 찾아가지 않아도 개방된 물에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여건과 문화가 부러웠다. 사실 호수에 들어간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조금 찝찝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내 생각과 달리 물은 매우 맑아 보였다.

 우리는 나무 의자에 앉아 한가롭게 풍광을 즐겼다. 내가 캐나다에서 살게 된다면? 미래의 자식과 캐나다에서 살게 된다면, 이런 곳에 편하게 와서 같이 수영을 즐기고, 바비큐를 구워 먹고, 주변 산을 산책하고 캠핑하면서 자연과 함께 풍요롭게 지낼 수 있겠지, 생각하니 가슴 벅차고 신나면서도 내 현재 삶에서 상상할 수 있는 삶과 너무 달라 거짓말 같고 낯설었다. 열린 공간에서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여유를 보면서 우리나라에도 (없는 호수를 인구밀도가 빽빽한 곳에 만들어낼 수는 없겠지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체험이 담긴 공원이나 시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캐나다가 그저 잘 살아서가 아니라 누구나 의지만 있으면 양질의 환경에서 레저를 즐길 수 있는 점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보트를 대여해야만 하고, 바비큐 이용료를 내야 하고, 캠핑장 사용료를 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장비를 가지고 자유롭고 편하게 공간을 즐기는 모습이 부럽다. 호수를 한 바퀴 돌고, 앉아 호수를 볼 곳이 없어 호수가 잘 보이는 베이커리 카페에 들어가 빵을 잔뜩 사고, 호수가 잘 보이는 공간은 이미 만석이라 아쉽게 다른 자리로 발걸음을 돌렸던, 다소 아쉬웠던 나의 호수에서의 기억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정말, 우리나라도 아름다운 자연경관 주변에서 밥, 카페, 구경, 산책 말고 ‘담글’ 수 있는 곳들이 더 많아졌으면!


 해가 유난히 긴 곳의 여름이라 늦은 낮에도 해는 여전히 밝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쨍쨍한 기운도 한풀 꺾이고 기온도 서서히 내려갔다. 다소 쌀쌀한 날씨에도 꿋꿋이 물속에서 놀고 있던 사람들도 대부분 옷을 정리해 호수를 떠나기 시작했다. 우리도 눈부시게 아름답고 광활한 호수를 마지막으로 흘깃 쳐다보고 아쉽게 떠나야 했다.


 예전엔 나도 물에 들어가는 걸 참 좋아했는데. 언제부터 물을 봐도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들 정도로 물놀이가 낯설어진 걸까? 몸매에 자신이 없어 수영복 입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 때부터? 사람이 바글바글한 곳에서 돈을 내고 파라솔과 튜브와 씻을 장소를 빌려 얼음장 같은 물에 모래를 씻어낼 때부터? 이미 호수나 바다는 감상하는 곳으로 마음에 굳혀버린 나 자신을 보며, 저번엔 유픽 할 나이가 지나버린 것 같더니 이번엔 또 물에 굳이 들어갈 나이는 지나버린 건가, 생각한다. 아무것도 챙기고 나오지 않아도 되는 뽀송뽀송함이 더 좋아져 버린 걸까, 편리함에 또 져버린 것인가, 탄식하게 된다. 아니, 탄식하는 척하면서 내심 물에 안 들어갔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하면서, 또 안도하는 내가 싫어지면서.


이전 03화 돈 내고 고생은 이제 그만 - 유픽 대신 와플 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