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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그루 Sep 21. 2024

41시간짜리 7월 25일 하루의 기록

이역만리가 사람 덕분에 친근해지는 마법


2024년 7월 25일 밤 인천국제공항 출발,

10시간 비행

 난기류가 유난히 강하고 뒷자리 발차기도 유난히 강했던 비행이었다. 비행기간은 실제로는 내가 집에서 숙면을 취하는 시간인만큼 잠이 쏟아졌지만 자다 깨다를 수없이 반복했다. 세 자리짜리 창가에서 가장자리 쪽 분께서 멀미를 하는지 밥도 먹지 않고 계속 누워 자는 통에 화장실을 최대한 가지 말자는 생각에 물도 많이 먹지 않았다(실제로 비행기 출발 전쯤 화장실을 들른 후 비행시간 동안 화장실에 들르지 않았다). 비행기 뒤쪽에 앉아 ‘비프'는 다 떨어져 ‘피시' 대신 다소 딱딱하고 뽀득하지만 반가운 국물 맛이 나는 묵사발을 먹고, 캐나다에 내리기 전엔 느끼한 풍미가 일품인 오믈렛을 먹고 공항에 내렸다. 그 오랜 시간 비행을 했는데도 날짜는 아직 25일. 심지어 밤에 출발했지만 오후 쨍쨍한 시간에 도착했다.


7월 25일 오후 밴쿠버 국제공항 도착

 내려서 으레 하는 행사로 입국 전 서야 하는 긴 줄에 가려는데, 남편이 자기를 따라 오라며 텅텅 빈 내국인 줄로 갔다. 난 한국인 여권을 들고 온 데다 우리가 결혼했다는 증거도 없으며 저들이 내가 누군 줄 알고 통과시켜줄까 싶었으나 걱정과 달리 유리창 밖에 서 있는 직원이 남편의 여권과 함께 내 여권을 포개 간단히 보더니 쉽게 통과시켜 줬다. 줄도 서지 않고 공항 직원에게 최대한 해맑은 미소와 말투로 한껏 무해함을 증명하지도 않고 입국 도장도 없이 다른 나라를 통과하다니 신기하고 묘했다. 근데 입국 도장 안 받은 건 내심 아쉽다.


 공항에 도착하면 당연히 우버나 택시나 버스로 구글 지도를 켠 채 목적지에 잘 갈지 긴장하며 가는 게 익숙했는데, 남편의 외삼촌과 숙모께서 마중을 나와주셨다. 나에겐 공항도 차 타는 곳으로 가는 길도 매우 어색하고 새로웠는데 그곳이 낯설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하니 두려움이나 걱정이 없어 편했다. 한국어를 실컷 쓰면서 어느 길로 가 달라고 말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숙소로 이동했다.

 

17:30 한식 집밥 먹기

각종 나물과 부침과 고기가 정성스럽게 가득한 비빔밥을 먹으며 저녁을 맞이했다. 캐나다에서 첫끼로 한식을 먹다니 예상외였다. 비행기에서 느끼한 걸 먹었을 것 같아 준비해 주셨다고 했다. 어떻게 아셨지. 매콤한 고추장과 익숙한 나물들이 만나 뱃속 오믈렛을 싹 내려주었다. 두 분은 원래 외식을 하는 빈도가 잦았는데, 최근엔 재료를 사서 집밥을 해 드실 때가 많아졌다고. 코로나를 겪으면서 물가가 너무 올랐다 하셨다



21:00 아직도 해 뜸 - 동네 산책

이 모든 것을 다 하니 밤 여덟 시가 넘었는데 아직도 밝았다. 아홉 시쯤, 조금은 풀이 죽고 있는 햇빛과 함께 삼촌 숙모가 평소 산책하신다는 길에 같이 다녀왔다. 입구부터 곰 표지판이 평온하고 자연스럽게 붙어 있었다. 숲을 물끄러미 보자니 마침 해도 지고 있어서 더 깊고 으스스하고 무서운 느낌. 저기 곰이나 무서운 동물이라도 숨어있으면 어떡하나 두려우면서도, 그들에겐 우리가 더 무서운 존재일 탓에 모두들 숨어 나오질 않으니 아쉬움이 든 것도 사실이다. 최근에 귀여운 사슴을 본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보면서 부러움은 배가됐다. 그리고 야생동물이라곤 길고양이 정도만 보는 사람으로서 여러 야생동물과 같은 생활공간을 공유하면서도 두려워하거나 해치거나 공간을 분리하지 않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삶이 신기하고 긍정적으로 보였다. 우뚝 솟은 송전탑을 지나가면서 지지직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 진짜 같은데, 생각하며 식후 산책을 무사히 마쳤다. 분명히 낯선 길과 숲인데도 익숙한 사람들과 같이 걸으니 우리 동네 인근 마실 나온 기분이었다. 다만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외양이 나와 다르고 곰이 함부로 열 수 없는 쓰레기통이 설치되어 있긴 했지만.


22:00 골프 연습장

 근처 야경스폿까지 하나 더 보자 아홉 시 반을 넘어섰고 이제야 하늘이 제대로 어두워졌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해가 지고 나자 우리는 근처 골프 연습장에 갔다. 골프를 매우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삼촌께서 드라이빙 레인지에 데려다주신 것이다. 십 년도 전에 골프공 쿠폰? 을 잔뜩 사 두셨다며 골프공을 왕창 갖다 주셨다.

늦은 밤인데도 1, 2층 드라이빙 레인지엔 사람들이 가득했다. 난 지나가다 골프연습장을 볼 때 한 칸에 한 명이 와서 왠지 고독하게들 연습하는 줄 알았는데. 골프를 잘 치지 않더라도(미안하지만 문외한인 내가 봐도 굉장히 서툰 폼으로 운동하는 사람들도) 흥겹게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며 즐겁게 공을 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난 어쩐지 골프란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든다는 생각에 나와 맞지 않는 운동 같아서 시작한 적도 시작할 생각을 해본 적도 없는데, 생각보다 편안하고 즐겁게, 큰 부담 없이 골프를 놀이로 즐길 수 있었다는 생각에 흥미로웠다. 골프장이 먼 데 가지 않아도 동네 곳곳에 있고, 예약이 그렇게까지 치열하지도 않은 곳들이 많으며, 오후 늦게 예약을 하면 3만 원대에도 9홀을 치고 올 수 있다고 하시니 이곳은 골프가 나름 가성비 취미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는 골프장 짓는다고 하면 환경오염이라고 비판하는 걸 어릴 때 많이 본 것 같은데 여기는 인공적으로 산 등을 많이 훼손하지 않았는지, 숲과 평지가 너무나도 많아서 조금은 훼손되어도 괜찮은 건지, 기존 산림을 크게 해치지 않는 선에서 골프장을 조화롭게 지어서인지 크게 환경오염 범벅의 인공적인 느낌은 적었다. 야생동물들도 곳곳에서 등장해서 잔디를 뜯어먹는다고 하니 농약을 크게 치지 않았겠지?


이렇게 긴 41시간짜리 하루가 드디어 끝이 났다.

이방인으로서 난생처음 온 낯선 곳들만 골라 방문했는데 어쩐지 모든 곳이 친근하고 편안한 느낌이었다. 마치 영문판 게임을 깐 다음 한국 패치를 설치했을 때의 속 시원함이라고 할까. 비행기에서 실컷 자긴 했지만 자다 깨다를 스위치 켜듯 반복했으니 시차 따위는 무시하고 꿀잠을 잘 수 있겠다고 스스로 생각하였지만 시차 및 낯선 곳의 적응은 그리 쉽게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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