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영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슬프고 아름다운 제제 이야기
누군가를 마음에서 미워하면 그 사람은 마음에서 죽어가요.
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야만 하나요?
내 마음에 당신이 다시 태어 날 수 있게 그렇게 죽였어요.
처음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읽은 건 권장 도서로 한창 읽기의 유행이 지나고 나서였습니다. 사실 학교 때 처음 나와 짧은 시간에 유행처럼 읽혔던 책이지만 당시 우리의 현실이 책과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에 현실을 굳이 또 책으로 보며 괴로운 마음이 되는 게 싫었던 것 같습니다. 어린 제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먼저이지만, 당시엔 우리의 삶을 다룬 이야기들조차 일일이 검열을 받던 시기라 선뜻 손대지 않았었습니다.
아직도 다 사라지진 않았지만, 자식에 대한 부모들의 훈육 방법으로 폭력(매질, 손찌검, 언어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많이 불편했습니다. 그 깊은 마음 속이야 알길 없었지만, 자식을 부모의 소유물로만 여기고 자식의 성장을 위한 훈육 방법을 잘 몰랐거나 사느라 바빠서 우격다짐으로 자식을 키우던 부모들의 모습이 꽤 많았었습니다.
가난과 폭력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채 성장해 가는 작은 아이 제제. 가난이 주는 불편함과 폭력은 아무렇지 않게 익숙한 생활이 돼버렸고, 그 안에서 마음에 상처를 극복하려는 나름의 노력이 제재의 상상 속 대화일지도 모릅니다. 뽀르뚜까 아저씨를 우연히라도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니 마지막까지 뽀르뚜까 아저씨와 행복하게 우정을 나눌 수 있었다면 어떤 결말이 되었을까? 제제의 삶은 어떤 모양으로 변할 수 있었을까? 책을 읽으면서 매번, 그럼에도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제제와 성숙한(조금은 철이 빨리든) 제제의 모습 모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끔은, 제재는 어떻게 생겼을까? 제재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다들 내 안에 악마가 있대요." 늘 제제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성당에서 오랫동안 갖은 푸념을 하는 조그만 아이 제제. 가난한 브라질 가정에서 많은 형제자매들과 지내지만 실직한 아빠와 힘들게 먼 거리에 일하러 다니는 피곤한 엄마, 아이들은 큰 아이들끼리 서로서로 돌보며 자랍니다. 제제의 행동이 다소 엉뚱하고 상상력에 마음이 들떠 있을 때면 늘 어른들, 가족들은 자신에게 악마가 있다, 말썽을 피운다며 타박을 합니다.
잦은 폭력으로 온몸은 멍이 들어 성한 곳이 없는 조그만 아이. 친구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뽀르뚜까 아저씨의 차에 올라타던 제제는 크게 혼쭐이 나지만 제제의 다리가 불편할 때 뽀르뚜까가 친구로 손을 내밀며 우정을 쌓아갑니다. 비밀 친구가 되어 제제는 뽀르뚜까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서로 마음을 나누는 방법을 배웁니다.
속상한 일도, 심각한 일도, 창피한 일도 그 어떤 것이라도 이제 제제는 뽀르뚜까와 함께 하며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제제의 비밀 친구가 된 뽀르뚜까는 언제든 제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용기를 북돋워줍니다. 제제를 감싸주며 두 사람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곤 제제가 상상력을 키워갈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제제가 머릿속의 이야기를 마음 놓고 꺼낼 수 있도록 자신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펜을 선물합니다. 하지만, 행복하기엔 너무도 짧았던 시간이 가고 뽀르뚜까와 헤어지는 인생 첫 이별의 아픔도 겪게 됩니다. 한없이 슬프고 슬픈 제제의 마음은 아픔을 이겨내며 더욱 단단하게 자랍니다.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마음속 깊이 간직한 한 사람은 있습니다. 제제는 뽀르뚜까의 말대로 글을 쓰고 그의 묘지를 찾습니다. 뽀르뚜까와 지낸 아름답고 따듯했던 시간들, 늘 웃음이 함께했던 행복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뽀르뚜까와의 이별을 실감합니다. 아프게 자라던 성장기에 만난 뽀르뚜가와의 만남 덕분에 제제는 자신의 상상력에 날개를 키워갈 수 있었습니다.
내가 우리 차로 그곳에 데려다줄 테니깐
넌 이 근사한 얘기를 나한테 말할걸.
넌 모든 사람에게 네 얘기를 들려줄 거야.
그리고 난 또 너를 고향에도 데려갈 거야.
가고 싶지 않니?
뽀르뚜까와 만나기 전, 제제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곳은 작은 라임오렌지 나무 밍기뉴밖에 없었습니다. 상상 속의 목소리와 대화를 하고, 하소연을 하면서 스스로 위안을 얻는 아이 제제. 모두가 싫어하는 말썽꾸러기 제제지만 사실은 가난한 집을 위해 구두를 닦아서 스스로 돈도 버는 속 깊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처럼 자신의 선생님을 위해 꽃을 가져다주는 마음이 아름다운 아이입니다. 구두를 닦아 번 돈으로 실직한 아버지에게 줄 담배를 사 오는 아이, 자기보다 어린 동생이 마음 다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돌보는 아이입니다. 이토록 마음이 곱고 아름다운 아이지만 늘 자신을 미워하는 가족과 친구들 때문에 힘들어서 기차에 뛰어들고 싶다던 제재가 - 미움 때문에 사랑하는 마음을 거두어들이며 한 사람씩 죽이고 있다던 제제가 귀한 한 사람을 만남으로써 상상만이 아닌 자신의 앞날을 위해 나아가는 과정은 무척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책이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대개는 어느 한 가지엔 실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는 영화와 책 모두 각각의 이유로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영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는 브라질 최고의 작가 J.M. 바스콘셀로스의 동명 베스트소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영화화 한 작품입니다. 상상 속의 꼬마 제제와 뽀르뚜까를 영화에서 만나며 책으로 읽었던 감동 그대로 영화 속의 제제를 한없이 응원하게 됩니다.
하지만,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는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기억보다 더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