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바라보는 것에 자신이 속한 것을 동시에 느끼며,
개츠비가 죽은 후 뉴욕이 무서워졌다.
한 때 황금빛 신기루 같은 도시였지만 이젠 구역질이 난다.
사람들은 그의 집에서 그가 부패했는지 알아내려 했지만 그는 우리 앞에 서서 부패할 수 없는 꿈을 숨기고 있었다. 난 그곳에 서서 미지의 세상을 곱씹으며 개츠비가 얼마나 감탄했을지 생각했다. 데이지의 선착장 끝 녹색 불빛을 처음 봤을 때 그는 수많은 역경을 이겨냈고 자신이 그토록 소망했던 꿈을 거의 움켜잡았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의 꿈이 이미 사라진 과거라는 건 알지 못했다. 개츠비는 녹색 불빛을 믿었다. 썰물처럼 멀어져 갔던 완벽한 미래를 그땐 놓쳤지만 이젠 상관없다. 내일 우린 더 빨리 달릴 것이다. 팔을 더 멀리 뻗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찬란한 아침 우린 세찬 물결에 끊임없이 과거로 밀려나면서도 결국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 닉 내레이션
보란 듯이 야심 차게 성공한 인생을 살리라 세상을 향해 달려가던 한 남자가 뜻밖의 사랑을 만납니다. 어쩌면, 자기 인생의 성공을 가로막을지도 모르지만 오로지 한 여자와 평생을 함께 하기 위해 모든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습니다. 한 남자를 사랑했지만 조건이 좋은 다른 남자와 결혼한 여자, 가정에 소홀하고 문란한 남편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부유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어 그럭저럭 만족하며 삽니다. 잊고 지냈던 남자가 5년 만에 나타나 변함없는 자신을 향한 사랑을 일깨우며, 잠시 일상이 살짝 흔들립니다.
끔찍하게도 가난하던 어린 시절을 뒤로하고 자신의 삶은 완벽히 높은 빛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 개츠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운명처럼 자신 앞에 나타난 데이지(캐리 멀리건)와의 만남으로 자신의 운명이 달라질 거란 걸 깨닫습니다. 1922년 월스트리트의 호황으로 신흥부자들이 급격히 늘어나던 시절, 광기의 모습을 한 뉴욕엔 이미 도덕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한번 사로잡힌 물질의 힘 앞에 연일 파티를 벌이는 사람들의 광란은 걷잡을 수 없이 더해만 갑니다.
알코올중독과 불면증, 분노, 발작, 우울증을 앓고 치료를 받던 닉 캐러웨이(토비 맥과이어)는 자신이 바라보는 것에 자신이 속한 것을 동시에 느끼며, '나는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으면서, 인생의 무한한 다양성에 매력과 혐오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그가 얼마나 혼돈스러웠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들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화려한 뉴욕의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희망에 찬 사람을 볼 수 없고, 역겨움만 그득했던 시절, 닉은 개츠비를 만납니다.
딸이라서 다행이네요
바보로 컸으면 좋겠어요
그런 여자로 사는 게 속 편한 세상이잖아요
예쁜 바보
개츠비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데이지도 순수하게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지만 물질의 풍요 속에 살고 있는 데이지는 모호한 태도를 보입니다.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리며 어쩌면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는지도 모릅니다. 남편의 난잡한 외도를 알면서도 돈을 포기할 수 없는 데이지, 스스로 예쁜 바보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것은 아닐까요? 남은 삶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데이지를 기다리던 개츠비의 죽음을 접하고도 싸늘하게 짐을 꾸려 떠나는 데이지의 이기심 앞에 개츠비의 사랑은 지난날의 흔적으로 떠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성공한 삶을 위해 부모를 부정하고 이름을 바꾸고 철저하게 자신의 이상대로 삶을 만들어 온 개츠비, 데이지와 헤어진 5년간 다시 사랑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사람들을 모으고 파티를 엽니다. 건너편 선착장의 그린라이트를 바라보며 자신의 야망은 모두 데이지와 함께 하는 삶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개츠비의 삶이 온통 비밀스럽고 의문 투성이었지만 닉은 개츠비가 자신의 사촌 데이지를 어느 누구보다 순수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의문이 풀립니다. 자신의 미래와 꿈을 이야기하는 개츠비를 보며 닉은 비로소 그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데이지를 다시 만나고 선착장의 그린라이트의 특별하던 의미는 사라집니다.
영화는 시종일관 너무 강력해서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현란한 색감이 화려하게 조화를 이루며 아름답게 표현됩니다. 그린라이트에 의지하는 한 인간의 허망하고도 쓸쓸한 순수와 대조되면서 더욱더 화려함을 뽐냅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파티와 난장의 모든 현란함은 20년대 뉴욕의 물질에 찌든 인간의 허무와 공허, 혐오, 그리고 극강의 이기심을 그려냅니다. 구역질이 납니다. 시종일관 닉의 내레이션이 이끌어가는 전개는 한 인간의 생에 대한 안타까움과 시대에 먼지처럼 떠도는 혐오와 환멸을 덤덤하게 드러냅니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믿었던 개츠비, 왜곡된 사랑이었을까요? 아니면, 진실한 사랑의 힘을 믿는 순수함이었을까요? 자신의 꿈과 미래에 대해 확신하던 개츠비의 사랑은 어쩌면 맹목적인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도 결핍을 느끼는 빈 껍데기의 삶, 아마도 그래서 더더욱 자신이 지어낸 과거 이야기를 사실처럼 믿고 미래를 꿈꿀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데이지의 선착장 끝 녹색 불빛에 모든 것을 걸었던 개츠비의 순수함에서 닉은 구역질 나는 뉴욕에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주변 사람들을 파멸시켜 놓고 돈과 이기심 뒤에 숨어 버리는 사람들 속에서 개츠비는 적어도 자신의 사랑과 꿈을 지켰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