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소식이 없는 것은 무사히 잘 있다는 뜻으로, 곧 기쁜 소식이나 다름없다는 말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설사 소식을 전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별일 없는 것이니 걱정하거나 서운해하지 말라는 것이겠죠.
일상에서 자주 쓰이기도 하는 말인데,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의 진짜 의미는 뭘까요? 왜 이런 말이 생겼을까요? 전하지 않는 소식을 기다리는 걸까요? 아니면 소식 없는 시간에 대해 애써 외면하는 나름의 위안일까요?
엄마와 가까이 살게 된 시간이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알게 모르게 엄미와의 관계에도 어떤 패턴이 생긴 것을 깨닫습니다. 인생이 대체로 맑고 흐리고를 반복하는 동안 가끔은 비, 그리고 또 더 가끔은 쨍하고 볕 좋은 날이 온다는 걸 이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엄마와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요.. 사람이 사람을 만나 인연이 이어진다는 건 서로 다름 속에서 아웅다웅하다 싫은 것까지 은연중에 닮아가는 과정인가 봅니다.
엄마의 레퍼토리는 이제 거의 고정화되어 있습니다. 어수선하게 한바탕 소란(엄마에게는 그저 그런 일이겠지만)이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한동안 고요한 침묵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유일하게 엄마와 제가 따로 연락하지 않고 지내는 기간이 옵니다. 마치 큰 소용돌이를 친 바바람이 잦아들고 난 시간처럼 조용합니다. 사실 크게 보면, 대부분의 분란이 별일도 아니고 결국 해결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저 감정만 건드리는 경우들인지라 엄마는 머쓱하기도 하고 달리 뭐라 구실을 대기도 그렇고 해서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습니다. 옛말에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이 있습니다. 딱 그 말이 맞는 순간인 것 같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엄마가 연락이 없을 땐 정말 아무 일도 없이 잘 지내는 겁니다. 날이 좋아 어딘가 꽃놀이나 단풍놀이를 갔거나 친구들과 여행을 갔거나, 아니면 성당 행사에 참여를 했거나 지역 노인들 모임에 나갔거나, 아니면 동생과 바람을 쐬러 멀리 나갔거나...,, 다 이유가 있어서 바쁘다는 의미입니다.
차라리 잘 몰랐거나 의도치 않게 발생한 일들로 서로 불편해진 거리면 어느 한쪽이 쉽게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을 먼저 건넬 수도 있을 텐데 피차 고칠 수 없는 성격과 꺾이지 않는 고집으로 이렇게 강제로 감정의 휴지기를 보내야만 합니다. 이 기간엔 저도 좀 숨을 돌리고 감정이 쉬어야 하는 시기입니다.... 그래도 가끔은 엄마기 어른 노릇을 좀 해줬으면 할 때가 있습니다. 벌써 계절이 바뀌고 있습니다. 변화의 계절이라 좀 신경이 쓰입니다.
여전히 정해진 곳을 매주 정해진 요일동안 - 마치 학교를 가듯, 출근을 하듯 서둘러 다니는 엄마를 이젠 말릴 재주가 없습니다. 보면 또 싫은 소리가 나오고 기분만 상할 것이 뻔해 일부러 안부를 묻지 않은 채 벌써 2주일이 훌쩍 흘렀습니다. 제겐 바쁜 시간이기도 했지만 문득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듭니다. 무슨 일이지? 왜 이렇게 조용하지? 이상합니다.
어영부영 어색한 시기가 지나고 나서 다시 마주합니다.... 엄마는 당신이 할 말이 없으면 꼭 밥상을 차립니다. 묻지고 않고 주방에서 혼자 뚝딱거리는 소리가 몇 번 나고 나면 음색 냄새가 납니다. 그러면 그냥 밥을 차려 겸상을 하게 됩니다. 꼭 체할 것 같은 기분이지만(저는 기분이 좋지 않거나 생각이 많아질 때 뭔가 먹으면 꼭 탈이 납니다.)... 맛은 좋습니다. 그리고 스르르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래도 감정적으로 깔끔하기 어려운 것이 가족관계임이 분명합니다. 매사 구별이 흐리멍덩하다고 해야 할까요? 매사가 이런 식이라 짜증스럽습니다.
어른도 솔직해야 합니다. 사회생활과 자기 삶의 모습이 똑같은 사람이 얼미니 될까 싶지만 그 불일치의 간극 이상으로 각자 삶에 대한 만족은 훨씬 편차가 큽니다. 그저 휩쓸려 정신없이 살다 보니 나이를 먹었더라,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다 보니 삼십 대, 사십 대 중반이더라... 이 일반적인 모습에서 자신 있게 스스로 자신은 예외라고 할만한 사람이 얼마니 될까요? 저 역시 그렇게 살아왔고 흐릿한 자각 속에서도 마땅한 다른 시도를 못했던 긴 시간을 지내왔으니까요. 적어도 자식들과 문제가 생기거나 잘못된 일로 사과를 해야 할 땐 되도록 신속하고 명료하게 하려 노력하는 편입니다. 설사 얼굴을 마주 보고 사과할 수 없을 때조차 카톡을 이용해서라도 꼭 미안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제가 쿨해서가 아니라 그래야 서로 감정에 찌꺼기가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엄마에게 받지 못한 것을 스스로 자식들과의 관계에서 실천함으로써 엄마와 같은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자라오며 배운 것 이상을 하기 어렵다고 했던가요? 감정의 표현을 배우지 못한 엄마 세대를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 모습을 제 스스로 답습하고 싶진 않습니다.
가족 이외의 세상에서 만난 사람들을 대할 때처럼 가족을 대할 때도 적당한 거리도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필요한 말과 감정은 전하고 함께 공감하며 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어색한 침묵의 시기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참 많이 낯설기만 합니다. 무소식의 기간도 적응이 필요한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