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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uwriting Sep 20. 2024

09. 뭘 한다고?... 나, 지금 회의 중이야


나이를 먹으면 생활 습관도 몸의 움직이는 속도만큼 달라지고 새로운 질서와 적응력을 만들어내는가 봅니다.




엄마는 천성적으로 부지런해서 늘 주변을 정리 정돈하고 깔끔함을 유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천성에 더해 엄마보다 더 깔끔하고 매사 정확한 루틴으로 움직이고 생활하는 아버지를 만난 덕에 지금까지도 생활 곳곳에서 깔끔한 정리 방식은 일부 유지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엄마집에 가면 마치 재래시장 노점에 들어선 기분이 들곤 합니다. 거실부터 부엌까지 죽 펼쳐진 물건들, 상대적으로 보면 그 정도야 뭐,,, 할 수도 있는 수준이긴 하지만 엄마가 늘어놓는 양은 한 해 한 해 점점 늘고 있습니다. 저 속에서 찾고 싶은 걸 찾을 수는 있을까?






아, 엄마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걸 좋아했었지!



주 2회 수영을 다니는 엄마는 몸이 크게 아픈 곳 없이 건강합니다. 특히 엄마는 당신이 돈 내고 다니는 곳은 빼먹으면 손해(공짜보다 더 억울해 합니다.)라 생각합니다. 요사이 가끔씩 요일이 깜빡깜빡하다며 수납장에 ‘수영장 가는 날’을 커다랗게 적어 놓고 빠지지 않으려고 열심입니다. 퇴근길에 잠시 들러볼까 하고 올려다보는데 수영장 다녀올 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 집에 불이 꺼져 있습니다. 이상하네???       

    

“ 엄마, 지금 집 아냐?”

“ 나 지금 회의하고 회식 중이야,... 왜?”

“...? 잉? 무슨 회의? 회식을... 한다고? 수영장 안 갔었어?”

“디 끝나가. 끊어봐!”



나이를 먹고 기억력이 자꾸 떨어져서 뭘 찾으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급하게 나가거나 약속이 있어서 뭔가를 챙겨야 할 때 진땀이 난다던 엄마의 말이 기억납니다. 잠깐 자신이 바보가 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던... 학생 때 지저분하게 어질러진 책상을 정리하라고 아무리 엄마가 잔소리를 해도 귓등으로 듣고 말았던 때가 저도 있었습니다. 혼돈 속의 질서(?)를 나름 유지하고 있던 - 그와 같은 것이겠지요? 그쯤 되면 그냥 그대로 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음, 그런데 쭉 둘러보다 낯선 것이 발견됩니다. 뭐지? 저 두툼한 책자는?



"갑자기 그걸 왜 엄마가 하는 건데?"

"몰라, 그냥 한 달에 한번 나가서 그냥 앉아 있으면 된데. 뭐 하는 거 없어."

"...? 그럴 리가 없는데? 아파트 돈 쓰고 뭐 결정하고 그런 거 같이 하는 걸 텐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찬성도 반대도 못하고 어쩔라고 그러는 거지?"

"몰라, 복잡한 건 머리 아파서 못한다고 했으니까, 알아서 하겠지 머. 1년만 하고 그만둘 거야."


참, 남일 말하듯이.... 아파트의 일이라는 게 자원봉사처럼 마음 편하게 할 일도 아니고 품은 품대로 팔고도 비난을 듣기 좋은 일인데 굳이 왜... 하지만 이미 말릴 단계가 지난 듯합니다. 회의를 한다며 주기적으로 모임을 나가고 있었으니까요. 아파트가 지어지고 동대표 선출이 여의치 않아 현재까지 부재였던 적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이번에 꼭 선출을 해야 하는데 할 사람이 없습니다. 지인 추천( 이미 아파트 대표회에서 활동 중이신 분)으로 갑자기 동대표를 하게 됐답니다. 80대 노인이 뭘 알고 대응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역지사지는 아닌데,  갑자기 불만이 사라졌네?


엄마는 역지사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당신의 입장을 누군가 이해하지 못하면 그저 잠시 서운한 마음뿐이고 다른 사람의 입장이 이해가 안 되면 '그저 그런갑다.'하는 생각 외 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현명한 처사인지도 모르지만 천성적으로 깊이 고민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당신 말로는 그래서 '뒤끝이 없다'고 주장하는... 하지만, 때로는 상대방에 대해 왜 그런지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법도 한데 아직까지는 그런 예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관리사무소 욕을 안 하는 날이 왔습니다. 엄만 매번 계절이 바뀔 때마다 베란다 창문 얼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유리 청소를 하지 않는다며 늘 불만을 얘기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동대표가 된 뒤로는 그 이야기가 쏙 들어갔습니다.


"이왕 동대표 하는 거고 회의에 참석하면 베란다 유리 청소 좀 하자고 해 보지 그래?"

"응, 그거 안돼."

"왜? 맨날 관리비는 꼬박꼬박 내는데 청소 안 해서 답답하다고 뭐라 하더니?"

"다른 데 돈 쓸데가 많아서 안돼."


아니, 저렇게 확신에 차서 안된다고 하다니, 요점은 아파트가 오래돼서 우선 엘리베이터 교체가 시급하다는 결론으로 유리창 청소는 문제가 안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어떻게 이해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 뒤로는 아무 불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고둥학교 때 준거집단이란 용어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준거집단 내에서 역할 모델을 찾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사회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자신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어디엔가 소속되어 있습니다. 강력한 소속감이 없는 경우 심지어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무리 소속을 갖지 않는 사람조차도 의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하나 이상의 소속을 갖게 됩니다. 그 기본적인 것이 가족공동체에서 시작됩니다. 개인의 선택과는 무관합니다. 그 안에서 함께 살고 규범을 익히고 성장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특정 집단에 소속이 되었다가 떠났다가를 반복합니다. 특별한 일은 하지 않는다면서도 뭔가 당신이 새로운 모임에 함께 한다는데 조금 신이 나 보입니다.





잠시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집단에 소속되지 않게, 최소한의 고리로 살아간다면 어떨까? 말 그대로 혈혈단신으로 산다면? 하지만, 의외로 소속감에 목말라하는 우리 모습을 자주 봅니다. 좋은 날, 슬픈 날처럼 감정이 울컥하는 순간에 특히나 혼자라는 느낌을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엄마의 관심이 다른 한 곳에 더 추가됨으로써 벽에 걸린 엄마의 커다란 달력엔 일정 메모가 한층 더 빼곡해졌습니다. 저보다 더 바쁜 엄마의 일정, 괜찮은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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