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를 때, 아니면 '엄마'를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나를 세상에 낳아준 고맙고 무한 크기의 사랑을 보내는 사람, 내 삶의 바탕을 길러준 사람, 세상이 무너져도 언제나 든든한 나의 지지자가 되어주는 사람, 무엇이던 척척 해내는 만능을 보유한 사람, 어떨 땐 아버지보다 더 크게 집안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 있는 사람.... 얼마나 많은 생각들의 결정체로 이루어진 이름인가요?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의 뒷면에 또 다른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같은 말을 아무리 반복해도 늘 새로운 것처럼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 매일매일 가족이 궁금한 사람, 또 그만큼 동량의 잔소리를 품고 있는 사람, 세상에 듣기 싫은 모든 잔소리는 몽땅 잊지 않고 지칠 때까지 하는 사람, 잠시의 불편도 견디지 못해 시도 때도 없이 SOS를 보내는 사람...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같은 이름도 모두 저에겐 역시 ‘엄마’입니다.
나와 가장 가까우면서 내가 가장 많이 화내고 함부로 해서 미안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자꾸 싫은 소리를 퍼붓는지. 별일이 아닌 일에도 모진 소리를 하는지... 엄마가 살아온 세상과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너무도 다른데 자꾸 동일시를 강요당하는 것이 거북하고 동의할 수 없어서 아직도 자주 삐걱거립니다. 그나마 살짝 농담처럼 피해 갈 여력과 테크닉이 생겨서 서로에게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문득 파르르 할 때가 있긴 하지만...
엄마에 대한 강한 기억은 대략 세 가지 정도입니다. 첫 번째는, '닭사건'에서 보듯 강력한 생활력을 가진 엄마의 모습은 매우 현실적이고 억척스럽다는 점입니다. 아직도 이재에 밝고 세상 흐름에 민감한 걸 보면 타고난 것 같습니다. '닭사건'의 이야기는 연재 3화에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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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갖고 있는 강력했던 엄마에 대한 기억은 가장 짧은 순간이었지만, 첫 아이를 낳기 직전 병원에서 한참 동안 머리를 쓰다듬으며 곱게 빗어주던 엄마의 모습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 말 안 했지만 제가 엄마가 되는 순간에 대한 복잡한 여러 생각이 함께 뒤섞였던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세상이 무너진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좀 기대고 고민도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엄마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엄마에게 의지하기보다 엄마를 돌보는 수준으로 살아야 했던 시간이 조금 답답했고 뭔가 허기진 기분이 아직도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기대하고 바라는 모습이 있듯 저 역시 엄마에 대해 나름의 이미지를 그려두고 그에 맞지 않아 속이 상했던 것 같습니다.
엄마가 엄마 역할을 해 줬으면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신체적 양육 외에도 심리적으로 정서적인 안정감을 받고 싶었고, 기대고 싶은 대상 - 어른으로서 위안을 주는 그런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야속하게도 제게 그런 만족은 주지 못했습니다. 나중에야 이해가 되는 건 그래도 엄마는 당신이 아는 한 충분히 애를 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애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걸 표현하거나 챙기고 보듬어줘야 하는 방법을 몰랐던 거라는 걸 이젠 압니다.
가끔은 당신이 서운할 때마다 반복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엄마라도 뭘 그렇게 다 알겠냐! 엄마가 모를 수도 있지, 그걸 더 배운 니가 이해를 해 줘야지."
처음엔 어이가 없었지만, 생각해 보면 굉장히 솔직한 고백이구나 깨닫습니다. 아, 그래 엄마도 모든 걸 알 수 없었구나, 엄마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을 수도 있겠구나.
자식을 기르는 엄마로서 저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엄마가 어른 노릇을 좀 해주길 바랐으면서, 실제로는 되도록 어른 노릇을 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자식들 문화는 우리 때와 다르고 생각도 훨씬 개인적입니다. 저 역시 개인적인 성격면에서 뒤지지 않는 사람인지라, 그런 면에서 서로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기에 자식들과 충돌이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장점이겠죠? 서로 의지하고 즐겁게 웃고 힘든 것을 나눌 줄 아는 그런 시간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자식들도 자신들의 일상을 스스럼없이 말하고 의견을 구하기도 하고 스스로 판단하며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결정과 책임은 스스로의 몫이니까요. 제 성장기에는 이런 과정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계실 땐 아버지의 의견을 중심으로 생활했었고 돌아가시고 난 후 이제 막 성인이 되던 때였지만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해서 살아야 했습니다. 엄마의 의견이나 생각은 아버지 생전에도 사후에도 제겐 큰 영향도가 없었습니다. 사실 꽤 서먹한 모녀 사이였지만 자식을 키우며 자연스레 관점이 바뀐 것 같습니다. 엄마가 계실 동안 좀 더 친해져야겠다고. 그러면서 점차 갈등도 생기고 투탁거리는 중이지만 사실 그러기 전에는 싸우고 대들고 따지고 할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엄마의 잔소리를 나름 극복하는 방법을 터득하고부터는 더더욱. 엄마는 제게 특별한 요구도 비난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현재는 영상이나 사진으로 남길 수도 있지만 지난 시간의 이야기들은 글로 남기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나름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살아온 시간은 모두 각자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테고 파란만장하기도 했을 겁니다. 힘든 순간도, 행복한 순간들도 있었을 겁니다. 엄마를 마주할 때마다 내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자주 돌아봅니다. 누군가 말합니다. 아직 엄마와 함께 지낼 시간이 남아 있어서 그러는 거라고. 배부른 투정일지도 모른다고. 이젠 좀 더 웃을 일들을 만들고 함께 행복해야겠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지만, 또 남은 시간에도 분명히 서로 타박하고 으르렁 거리겠지만, 그마저도 나중엔 추억하겠지요. 조금은 가벼운 농담처럼 지내는 것도 괜찮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