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커피를 좋아하는 男, 뜨거운 커피를 좋아하는 女

극과 극은 어떻게 통했을까

by 정혜영


"커피 마실 거야?"

식후 무조건 커피족인 아내는 커피를 타기 전에 남편에게 묻습니다. 아내가 타 준다면 생각 좀 해보겠다, 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평소에 '생각'이라는 것을 안 하고 사는 사람이 뭘 이럴 때만 하겠다는 건지, 순간 괘씸한 마음이 듭니다. 그래도 남편이 정성스럽게 준비했던 요리를 너무나 맛있게 먹었던 터라, 아내는 너그럽게 커피잔을 두 잔 꺼냅니다.


아직도 믹스커피를 못 뗀 아내, 갈아놓은 원두 파인 남편. 커피를 담는 동안 팔팔 끓인 물이 조금이라도 식는 게 싫어 다시 한번 포터의 스위치를 누르는 아내, 뜨거운 것은 입도 못 대어 끓는 물 2/3와 찬 물 1/3을 함께 섞어 한소끔 식혀서 마시는 남편.

마시는 커피 하나에도 이렇게 취향 차가 극과 극인데 어떻게 이런 두 사람이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사는지 아내는 가끔 궁금해집니다.




미혼이었던 아내는 돈 없고 안 생긴(죄송합니다. 저도 어릴 적이 있었네요.) 남자는 참아도, 말귀를 못 알아먹는 남자는 도통 참아지지가 않았습니다. 직설적으로 말하기 힘든 얘기를 조금만 돌려 말해도, 은유나 비유를 조금만 섞어 말해도 말의 핵심을 알아채지 못하는 남자는, 정말이지 두 번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1순위였습니다.


그것은 지식이 많고 적음의 문제도 아니요, 가방끈의 길고 짧음의 문제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말을 수려하게 잘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도 아니었지요. 아내는 쓸데없이 말만 많은 수다스러운 남자는 또 딱 질색이었으니까요(남자 보는 눈이 굉장히 낮았던 저였는데 이렇게 쓰고 보니 굉장히 높았던 것 같아 보입니다. 글이 부리는 마법입니다). 상대방이 하는 말에 집중하고 그 사람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갈 노력이 없는, 나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없다는 뜻이거나, 자기 외의 세계에는 그다지 관심을 가져본 적 없는 사람인 것 같아서 대화할 '맛'이 안 났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남편과의 수줍은 첫 만남에서 아내는 다른 세계와 만난 느낌이었습니다. 남자와도 몇 시간 동안 수다를 떨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별난 체험이었습니다. 무슨 주제로 그렇게 많은 얘기를 나누었었는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지만, 한 번 대화를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노닥거렸으니, 아내도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성'과 '절제'의 두터운 옷을 입고 살아왔던 아내는, '거침없는 도전'과 같은 남편과의 말과 행동이 낯설면서도 경이로웠습니다. '큰 딸'의 책임과 반듯함이 때로는 버거웠던 아내가 '막내아들'인 남편에게서 모처럼 숨구멍을 찾았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 남자 앞에서는 그냥 자신의 모습을 더하고 뺄 필요가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삶의 피로를 잠시 내려놓았던 듯합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가로등이 아니었더라면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었을,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던 야외 경기장 계단에서, 아내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어릴 적 상처들, 자신도 잃어버렸다고 착각하며 살았던 아픈 기억들을 모두 토해내고는 아이처럼 꺼이꺼이 울고 말았습니다. 그때 아내 등을 쓸어주던 남편의 두툼한 손길에서, 적지 않은 계단을 아내를 어부바해 내려가던 남편의 넓은 등에서 아내는 꼭꼭 눌러두었던 아픔들을 모두 날려 보냈습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그렇게 손과 등을 빌려줬을지도 모르는데, 남편은 참 아내 마음을 쉽게 얻었구나, 싶습니다. 아내가 그렇게 쉽게 마음을 주었으니 남편이 이날 이때까지 아내를 쉽게 보고 놀리며 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결혼해 보니 남편은 생각보다 '생각'이라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인 데다, 어떻게 저런 어휘로 여자와 끊임없이 대화를 할 수 있었을까, 싶은 사람입니다. 전에 아내가 알던 그 사람은 어디 가고, 그의 속마음을 알 길 없어 답답했던 아내로 하여금 <남자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남자의 심리>(다카하시 쿄이치 저)나 <나는 다른 사람과 살고 싶다>(이주은 저)와 같은 책들을 들여다보게 했을까, 싶습니다.

20여 년 전 그때, 아내의 눈에는 단단히 색안경이 쓰였던 게 분명합니다.


그래도 그때 남편의 등에 업혀 날려버렸던 아내의 슬픔들은 그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아내는 남편의 커피잔에 커피 외에 다른 것도 한 스푼 담아 타 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자기 마음도 잘 모르면서 말입니다.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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