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인연'이 된 사람들

2022년 고마운 이들을 떠올리며

by 정혜영


2022년의 마지막 글은 무엇에 대해서 쓰면 좋을까?

우리 반 아이들이 좋아하는 글의 주제는 언제나 '자유 주제'다. 몇 줄 쓰기도 힘들어하던 꼬맹이들이 이제 선생님과 함께 정하는 주제보다 자신이 직접 고르는 주제를 선호하다니 녀석들, 많이 컸다.


그래도 올해 마지막 글은 중구난방인 주제보다는 우리 모두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정서를 끌어내 보고 싶었다. 그렇게 정한 주제가 '올해 고마웠던 사람'이다. 올 한 해 가장 고마웠던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는 글을 써 보기로 했다. 글의 형식은 편지, 시, 산문 등 쓰고 싶은 대로 쓸 것.


국어 시간에 친구에게 마음을 전하는 편지 쓰기를 할 때, 기영(가명)이는 고마웠던 친구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며 한참을 못 쓰다 결국 부모님께 감사 편지를 썼더랬다. 기영이가 이번에도 친구에게 쓰기는 힘들겠구나, 생각했는데 웬걸, 공책 두 페이지 반을 써냈다. 얼마 전, 기영이 어머니는 기영이가 2학년이 끝나가는 걸 매일 아쉬워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셨다. 친구들과 엄마, 아빠, 그리고 반려견에게까지... 두 페이지 반 가득히 아쉬운 마음을 가득 담은 기영이의 글. 마음이 움직이면 글이 저절로 써지는구나. 친구에게 쓴 일부분만 옮겨본다.


우리 반 친구들아! 우리 이런저런 일이 엄청 많았지. 어떨 땐 싸우고 어떨 땐 웃고. 이런저런 일이 엄청 많았지? 여러 과목들도 공부하고 밥도 맛있게 먹고 즐겁게 집에 가고. 너희들이 행복하면 나도 좋아. 너희들과 함께 한 순간순간이 재미있고 행복했어.
얘들아, 내년에도 건강하고 내년에도 기죽지 말고, 파이팅!! 내가 너희를 위해 매일매일 기도할게! 안녕!


헤어짐을 코 앞에 둔 아쉬움은 싸운 기억마저도 추억으로 만든다. 남자아이치곤 감수성도 예민하고 공감력도 큰 기영이에게 '친구'에 대한 기억이란 주로 1학년 때 받았던 마음의 상처였다. 그런 기영이가 친구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해 주는 아이로 2학년을 마치니 내가 다 감개무량하다.


이별이 못내 아쉬운 아이들은 주로 친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글을 썼다. 친구에게 고마운 이유는 다양했다. 학용품이나 준비물을 빌려줘서, 사람을 쉽게 그리는 방법을 가르쳐 줘서, 역할극 상대를 해줘서, 같이 놀아줘서, 빼빼로를 줘서... 친구와의 고마운 순간을 떠올리고 감사의 마음으로 채우는 아이들의 표정이 어떠했을지는 말 안 해도 비디오.


00아, 올해, 한 해 같이 있어줘서 고마워. 나는 너한테 해준 것이 없는데, 너는 나한테 많이 해줬잖아.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내년에도 같은 반이 될지 모르겠지만 내년에는 내가 더 잘해줄게.


타인에게 받은 것보다는 자기가 해 준 것 위주로만 기억하는 이들에게 박하(가명)의 문장을 들려주고 싶다. 친구와 관계 맺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저 곁에 있어주는 친구가 있다면 감사하라고. 특히 자신은 별 도움이 되어주지도 못했는데 여전히 곁을 내어주는 친구라면 이제는 그대가 좀 더 신경 쓰라고.


선생님, 한 해 동안 저를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공부를 잘하게 되었으니 더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내용의, 학생이 담임 선생님에게 쓰는 표준 예시글 같은 문장들은 '중략')
선생님이 열심히 가르치신만큼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그리고 선생님이 걷는 인생은 꽃길일 거예요. 다음 해에는 지금 우리 반보다 더~ 행복하고 배려하며 사랑하는 반이 되세요.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행.배.사.'는 3월에 만들고 싶은 우리 반을 계획하며 아이들과 함께 정한 우리 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행복하고 배려하며 사랑하는' 반이 되자는 목표를 세우고 지난 1년을 열심히 달려왔다. 단풍이(가명)가 기원해 주었으니 이제 내 인생은 꽃길이 될 일만 남았다. 아이들이 바라는 소망은 우주의 기운이 달려들어 들어주니 말이다. 대가를 바라며 아이들을 대해 온 것은 아니지만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단풍이의 말을 마음에 담아본다. 그리고 계속 주문처럼 외워본다.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선생님, 저희가 2학년 때 우연처럼 만났잖아요. 그러니 내년이 아니고 2024년에라도 다시 우연처럼 만났으면 좋겠어요!


목소리도 크고 발음도 또박또박해서 미래의 아나운서감인 이슬(가명)이가 편지를 읽게 그냥 둘 걸. 어쩌자고 나는 이슬이의 편지를 읽어주다 감정이 북받치고 말았나. 나이가 들면 눈물이 많아지는지, 감정이 여려지는지 걸핏하면 감동이다.

내년에 또 만나고 싶다는 말보다 왠지 더 마음에 훅 들어오는, 후년에 다시 우연처럼 만나고 싶다는 말에 그만 울컥. 눈물이 날까 봐 몰래 숨 한 번 들이키느라 읽다가 잠시 멈춘 걸 아이들이 눈치채진 않았겠지.

우연이 인연이 되어 몹시 좋구나. 드라마 <도깨비>의 대사를 빌어 나도 너희들에게 얘기해 주고 싶다. 너희들과 함께 한 모든 순간이 눈부셨다고. 꽃길 걷다 우연처럼 너희를 다시 만난다면 참 좋은 일이 생긴 걸 게야.


23년 차 초등학교 교사라는 내 정체성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아이들, 항상 응원하며 지지해 주는 가족, 자주 안부를 확인하며 이제는 자신을 돌보라 격려해주는 내 갱년기 친구들 덕분에 올 한 해도 무탈히 지낼 수 있었다.

꾸준히 이 공간에서 내 글을 찾아주시는 독자들과 같은 꿈을 꾸는 글벗 작가들은 노트북을 켜고 흰 공간에 반짝이는 커서의 깜빡임에 망연해지던 마음을 지탱해주는 힘이었다.

꿈만 같이 찾아온 행운, 브런치 대상은 좀 더 영양가 있는 글을 쓰라는 채찍이자, 이 공간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도록 해 줄 배양토다.

좋은 책으로 보답해야겠다는 부담은 짊어져야 할 행복의 무게려니.


2022년 한 해의 마지막 글을 함께 했던 좋은 이들과의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마무리할 수 있어 감사하다. 2023년에도 모두모두 행복하시고 꽃길 걸으시길.


2022년을 함께 해 준 모든 인연들, 감사합니다~♡(사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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