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다
스쿼트를 하다가 무릎이 아프면 전문가를 찾는다. 올바른 자세를 위한 기술을 배우면 무릎이 안 아프리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다르다. 사랑에 실패해 마음이 아프면 술을 찾는다. 사랑을 하는 데 어떤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2-1=0이 된 공허한 감정을 지우기 위해 알코올이 필요할 뿐이다. 이별 노래가 항상 Top 10에 있는 것이 증명하듯, 했다 하면 실패하는 게 사랑인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도 왜 사랑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이 사랑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프롬이형이 말하는 사랑에 대한 오해 세 가지와 사랑의 본질에 대해 알아보자.
첫째, 어떻게 해야 사랑받을 수 있을지 집착한다. 이성에게 인정받기 위해 권력, 돈을 쫓거나 몸을 가꾸고 치장하는 것이다. 현실적이거나 외적인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방법이 아닌 사랑’받는’ 부분에만 집중하는 것이 문제다. 이는 스쿼트를 잘 하기 위해 구릿빛 허벅지를 만드는 것과 같다. 구릿빛 허벅지가 스쿼트를 잘 하게 하는 건 아니듯, 사랑받기 위한 노력이 사랑을 잘 할 수 있게 만들지 않는다.
둘째, 어떻게 해야 올바른 대상을 발견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세상에 절반이 여자(남자)야’, ‘주변에 괜찮은 사람이 없어’ 등 헤어졌을 때 흔히 하는 자기위로는 사랑의 실패를 ‘대상’의 문제로 만든다.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고 올바른 대상을 만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프롬은 이런 태도를 20세기 이후 중매결혼이 없어지고 이성에 대한 선택이 자유로워진 현대문화의 특성이라고 말한다.
대상의 문제에 이어 또 다른 현대문화의 특징은 자본주의사회가 만든 사랑의 방식이다. 사랑의 방식이 물품 교환 방식과 동일해진 것이다. 글램(glam)이란 소개팅 어플이 전형적인 예다. 이 앱은 이성이 평가한 별점을 토대로 이용자의 등급을 네등급으로 나눈다. 매겨진 등급에 따라 자신과 비슷한 등급의 이성을 소개해준다. 자신의 물품과 상대의 물품의 값어치가 비슷해야 교환이 이루어지듯, 비슷한 등급의 이성끼리 매칭 되는 것이다. 자신의 등급이 낮게 나왔다고 좌절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 아닌가. 커피 한잔의 자본으로 다시 재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씁쓸해지기 전에 프롬이형을 데려오자. 프롬이형이라면, ‘자기 자신의 교환 가치의 한계를 고려하면서 서로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최상의 대상을 찾아냈다고 느낄 때에만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질 수 있다.(=매칭 될 수 있다)’(p.16)라고 글램을 비평했을 것이다.
셋째, 설레어야만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500일의 썸머’의 주인공이 낯선 이성과의 하룻밤 뒤 온 세상을 다 가진 듯이 춤추듯, 사랑을 시작한 짜릿한 설렘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격양된 감정 중 하나다. 문제는 이 짜릿한 감정만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서로 미쳐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p.17). 위 문장처럼, 프롬은 사랑을 시작할 때 느끼는 열정적인 감정은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증명할 뿐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프롬이 말하는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의지의 행위다.
사랑이 감정이 아니라 의지라니! '의지의 행위’라는 말은 또 뭔가 싶다. 책에서 ‘꽃을 사랑하는 여자’로 비유하는 부분을 통해 자세히 알아보자. 장미꽃을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는 A가 있다. A는 장미꽃을 자신이 가장 보기 편한 침대 옆에 두고 매일같이 사랑한다고 말하며 설렌다. 프롬이형은 이런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프롬의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한 ‘행동’이 있어야 한다. 장미꽃이 잘 자라기 위해 그늘진 침대 옆이 아닌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두는 것, 사랑한다는 ‘말’ 뿐만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물을 주는 것과 같은 ‘행동’이 있어야 사랑인 것이다. 즉, 사랑하는 존재의 성장을 위해 의지를 갖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기술>의 핵심, 사랑하는 것이다.
영어에도 ‘falling in love’가 있듯, 사랑에 ‘빠졌어’는 국적을 불문하고 사랑을 시작할 때 쓰는 흔한 표현이다. 이 ‘빠지다’라는 언어는 수동성이 담겨 있다. 내가 쓰는 언어는 내 삶을 담는다. 사랑을 수동적인 감정형태로 말하다 보면 우리가 사랑하는 방식도 수동적이게 될 것이다. 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햇볕이 아닌 그늘진 침대 옆에 두는 위의 A처럼 말이다. 사랑을 ‘잘’ 하려면 사랑을 말할 때부터 수동적인 언어가 아닌 능동적인 언어를 써야 한다.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행동하는 것이다.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꽃의 성장을 위해 햇볕이 잘 드는 창가를 찾고 물을 주듯이, 사랑하는 그를 위해 행동하자. 그의 관심사를 묻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어떤 행동을 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생각에 따라 행동하고, 행동에 따른 책임을 지며 능동적으로 '잘'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