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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과의사X Oct 27. 2020

응급실 에피소드

1.

돌 기념으로 수제치즈케이크를 먹었다가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난 아기가 왔다. 아기가 쌍꺼풀이 있었는데 그게 없어질 만큼 부었다고 했다. 문진 하면서 "너 생일이라고 엄마가 자기 먹고 싶은 거 사 왔구나 그치? 넌 치즈케이크 별로 안 좋아하나자"라고 말하니 엄마가 쑥스럽게 웃으며 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약 처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의 귀여운 쌍꺼풀이 다시 나타났다.


2.

조증 환자가 왔다. 문진을 하다가 태극권 같은 무술을 할 줄 아냐고 묻길래 복싱을 조금 배웠다고 하니 그때부터 계속 “선생님 잽은 이렇게 날리면 되냐”고 난리를 쳤다. 이미 충분히 잘 날리니까 일단 몸부터 가누시라고 진정시키니, 이제는 귓속말로 같은 무술인이어서 말해주는 건데 '나라 정'씨를 쓰는 내가 앞으로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 내가 이 말한 건 꼭 비밀로 해달라고 속삭였다. 고맙고 잘 알겠으니 제발 조용히 좀 있으라고 하니 그때부터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시작했다. 귀가하면서 응급실이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건강하십시오 정선생님”하며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나도 최대한 허리를 숙여 인사며 탠션 넘치는 악수를 나눴는데 나까지 무술인이 된듯한 기분이었다. 힘은 어찌나 센지 오른손이 부러질 뻔했다.


3.

“선생님 감사합니다" 단지 나와 몇 분을 함께 했던 환자가 집으로 돌아가면서 큰소리로 꾸벅 인사를 하고 가셨다. 아주 밝고 쑥스러운 표정으로. 밝고 쑥스러운 표정.. 아.. 그 오묘함이란. 하긴 평생 자기 응아를 손으로 만진 사람은 어머니 이후로 내가 처음일 것이다. 그걸 보면서 finger enema가 가장 짧은 시간에 깊은 라뽀를 쌓을 수 있는 엄청난 술기라는 걸 알게 됐다. 손가락의 길이만큼 라뽀가 깊은 듯하다.


2016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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