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융합이 주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다양한 지식을 머릿속에 입력하고 나면 뉴런들 간의 상호작용으로 새로운 경로가 가끔씩 생겨난다. 그리고 그 경로들은 나의 지식, 지혜 혹은 확증편향으로 삶을 살아 가는 자동 항법장치로 사용이 된다.
그중에서도 오늘 머릿속에서 새로운 연결이 일어난 고통의 개념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삶을 살다 보면 다양한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다.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스스로의 신체와 정신을 돌보지 못하기에.
개인적으로는 고통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고통과 고통을 해석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개념들은 아래와 같다.
몬티 라이먼(고통의 비밀): 고통을 인지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
브레네 브라운: 취약성의 힘. 수치심의 긍정적인 힘
스토아 철학(라이언 홀리데이): 고통을 확대해석하는 자아
불교: 공. 나라는 껍데기
생물학: 세포의 수명. 뇌 세포, 신경세포의 수명 7년
철학: 태세우스의 배. 무엇이 진짜 ‘나’ 인가?
텍스트 임베딩: tSNE시각화. 단어 간의 거리를 시각화해줄 수 있음
딥러닝: 전파, 역전파. 인공 신경망에서 학습이 되는 원리
스스로의 관심사, 혹은 유연한 기회로 인해 습득한 정보들은 뇌라고 하는 기관에서 예상치 못한 연결을 만들어내었다. 내 뇌 안에서 일어나는 ‘Connecting the Dots’인 것이다. 그것의 결과, ‘고통은 좋은 것이다’라는 감정적 판단 경로가 편도체에 새겨진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따라오는 관념은 ‘The Obsticle is the way: 장애물이 길이다.’라는 것이다. 고통은 내가 집중해야 할 대상을 알려준다. 그래서 고통이라는 신호에 감사하며 살게 된다. 고통은 즐거울 수 있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이런 생각이 적용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나의 특수성에 기인한 스스로의 해석일 뿐이고 보편적이지 아니하다. 어릴 적부터 신체적 고통, 사회적 압력에 대한 고통, 정신적 압박감 등 다양한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이것이 고통을 다양한 방면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또한 스스로 어렴풋하게 느끼는 것 중 하나는, 내가 선천적으로 고통에 대한 민감도가 높은 편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보편적이지 아니하지만 스스로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유용하다고 느끼기에 내게는 괜찮은 관념이다.
세상 당연한 것은 하나 없고 내 뇌만큼 속이기 쉬운 것이 없기에 다양한 실험을 해보며 살아가고 있다.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것이 즐거운 요즘이다.
Refe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