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객관적으로 볼 때 나는 객관적이지 않다

"객관적으로 볼 때..."라는 헛소리

by 경규승

데이터의 시대다.

5천 년간 축적된 데이터 양이 오늘날 하루 만에 축적된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양이 아닐 수 없다.


과거가 데이터의 시대가 아니었지만, 그 당시에도 데이터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태고적부터 데이터는 중요했다. 처음에는 데이터는 수집에 그친다. '저 산을 넘어가면 과일이 있다', '저 산에는 동물이 산다'와 같은 형태의 인지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알록달록한 색의 버섯을 먹었더니 며칠 동안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라는 연결을 찾아낸다. 데이터의 결합은 정보를 만들어 낸다.


예전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던 데이터는 문자라는 도구가 생겨나며 축적되기 시작한다. 농경 시대를 맞이하며 인류에게 공간이 축소되고 시간이 확장되는 trade-off가 발생했다. 하지만 데이터는 시공간을 모두 확장할 수 있도록 진화되었다. 가장 최초의 기록된 데이터는 점토판에 쐐기 문자로 쓰였다. 수메르(지금의 이라크 남부 지역)에서 축적된 데이터를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에서 5천 년이라는 시간 간격을 두고 확인할 수 있다.


점토판 기록은 다양하다. 함무라비 법전에서부터 곡식을 얼마 빌렸는지 증명하는 계약서까지. 다양한 내용의 데이터를 기록했다. 지금은 무궁무진한 형태의 데이터를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수집하는 시대이다. 내가 최근 생산한 데이터는 설문조사이다. 서비스를 평가하고 그 이유를 작성하는 평범한 설문조사였다. 하지만, 설문조사를 슥슥 작성하다가 잠시 멈추게 되었다.


"해당 설문은 모두 익명으로 처리되니 솔직하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답변해주세요."


객관적으로 답변해달라니! '객관'이라는 단어가 무겁게 다가왔다.




데이터가 객관적으로 수집 가능한 것일까?


객관적으로 사건에 대해 기술하는 것은 인지 능력에 부담을 준다. 특히 무언가를 평가를 하는 과정에서는 개인의 감정과 선호가 반영이 되지 않기 힘들다. 인지적 편향이 발생하지 않기 힘들다. 인지 자체에도 한계가 있고, 인지한 모든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며, 기억하는 사건들도 개인적인 선호의 차이로 중요도가 달라진다.


기록을 객관적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데이터를 해석하는 사람에게서도 편향이 발생한다. '문자'라는 의사소통 도구의 한계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글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읽히게 되어 먼저 읽은 정보와 나중에 읽은 정보의 순서에 따라 읽는 사람의 편향이 발생한다.


개인의 감정과 선호에 영향을 받지 않고, 순수하게 합리적인 사람은 아주 단순한 결정마저도 내릴 수 없다. 당장 굶어 죽는다고 하더라도 다음 식사로 무엇을 먹어야 할지 선택을 할 수가 없다. 지금 먹을 수 있는 모든 음식을 알아야 하고, 내가 돈을 어디까지 써야 하는지 알아야 하고, 내가 어느 정도로 배가 고픈지 알아야 한다.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서 이리저리 재기만 하면서 정작 선택은 하지 못한다. 감정은 선택에 소요되는 시간 낭비를 막아준다. 감정이라는 필터가 선택의 순간에 어느 수준까지 선택의 최적화 작업을 진행할 것인지 결정해 준다.


우리는 감정을 기반으로 자신의 선호를 결정한 뒤에 논리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이유를 만드는 경향이 있다. 주관적인 판단을 내리고서 객관적이라 생각되는 데이터를 가져다 붙일 수 있다. 감정 시스템으로부터 인지 시스템으로 가는 결합이, 인지 시스템으로부터 감정 시스템으로 가는 결합보다 강하다. 변인계에서 감정을 느끼고 나서 신피질에서 설명을 찾아내는 경향이 있는 우리 신체 구조에서도 증거를 찾을 수 있다.




객관적으로 완벽한 데이터를 수집했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삶은 불확실하다.


스스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과거의 서사에 기준하여 판단해서는 불확실성을 품에 앉고 갈 수 없다. 자신이 어떤 일을 오래 했으면 나는 그런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 예상하기 쉽다. 하지만 현실의 단면을 잘라서 볼 때, 오래 했다고 해서 그 일을 잘하는 것은 별개이거니와 과거의 시장에서 필요했다고 해서 현재의 시장에서 그 일이 필요한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 변화의 시점은 생각보다 갑자기 찾아온다. 변화는 서서히 찾아올 것으로 기대하지만 그것보다는 급작스럽게 찾아온다. 살아 있는 사람이 죽는 과정과 같다. 죽는 순간 생명은 1에서 0이 되는 것이다. 반쯤 죽어 있는 상태란 없는 것이다.


중요한 일은 급작스럽게 찾아온다. 예상했던 것 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찾아온다. 추수감사절 칠면조를 공급하기 위한 칠면조 농가의 칠면조는 살아있는 모든 순간 무던하게 살아간다. 칠면조는 자신의 과거를 돌아본다. 오늘은 자신이 태어난 지 999일 이 되는 날이고 998일 되는 날 주인은 먹이를 주었고, 997일에도 주인은 먹이를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1000일이 되는 내일, 칠면조는 도살된다. 평생 모은 데이터로 절대 1000일에 일어날 일을 맞출 수 없다.


분명 학교에서는 그렇게 배웠던 것 같다. 1일째 어떤 일이 있었고, n일 째 그 일이 일어났다고 가정할 때 n+1일 째도 그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면 1일째 이후 매일 그 일이 일어난다고 말이다. 하지만 어떤 법칙이 성립한다는 것은 꽤 제한적이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사는 현실은 수학적 귀납법이 성립 가능한 계가 아닐 경우가 많다.


이두희-수학적귀납법.jpeg


수학적 귀납법을 통해서 평생 여자친구의 피부가 깨끗할 거라고 이야기한다. 수학적 귀납법을 적용해보면 1. "오늘 피부가 깨끗했다.", 2. "n일 차 피부가 깨끗하다면 n+1일 차 피부가 깨끗하다." 두 가지를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두 번째를 증명하는 것이 현실에서는 힘들다. 오늘과 내일은 항상 다른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내가 혼나나 보다. 낭만 따윈 없다. 저 순간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이두희님은 대단하다.)




세상도 개인도 불확실하다. 세상은 언제나 변한다.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선택한다. 개인과 세상이 상호작용 하는 방법은 개인이 선택한 일을 현실에서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은 서사를 말하나, 세상은 서사를 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지금 바로 이 순간만 개인과 세상을 일치시킬 수 있다. 교점은 현재라는 찰나의 순간에만 존재한다. 내 선택은 주관적이고 가변하는 세상에서 내 선택의 결과는 달라질지언정, 내 감정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현재를 충실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월가의 현자라고 불리는 나심 탈레브의 글로 마무리한다.


"운을 다루는 직업을 통해서 나 자신이 감정을 다스릴 만큼 똑똑하지도 강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아이디어를 체계화시키고 실행하려면 감정을 사용해야 한다.
단지 내가 운에 속기 쉽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감성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만큼만 똑똑하다. 나는 감정에 지배받는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알기 때문에 기쁘다. 나도 이 책에서 내가 조롱한 사람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그뿐만 아니다. 나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다. 더 나쁜 사람인 것을 인정해야 한다. 조롱한 사람들과 나의 차이는 스스로 이 사실을 의식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오랜 세월 확률을 공부하고 이해하려고 애썼어도, 나의 어리석은 유전자 탓에 감정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다. 두뇌가 신호와 소음을 구분한다고 해도, 나의 가슴은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행운에 속지 마라 - 나심 탈레브 p276>




Reference.

<행운에 속지 마라 - 나심 탈레브>

<사피엔스 - 유발 하라리>

'수학적 귀납법' 외치며 지숙 피부에 감탄한 남자친구 이두희

Pixabay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빠르게 생활을 변화시킨 7가지 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