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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규승 Apr 24. 2023

드래곤볼 초신수 마신 이야기

아우슈비츠 수용소 포로 간접 경험

사람들에게 책 추천을 해달라는 얘기를 한다. 책 자체를 좋아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취향을 알 수도 있어서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토픽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여러 책들을 추천받았다. 파인만의 QED 강의, 에고라는 적, 사피엔스, 스케일, 안티프레질, 언플래트닝 등의 책을 추천을 받았고 여기서 몇몇 책은 내 인생책이 되거나, 인생 책을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평소 같으면 읽지 않았을 책을 읽게 되어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반대로 내가 책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받으면 사람의 성향에 따라 추천하는 편이다. 생각과 대화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언플래트닝’을 추천하고, 자기 계발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사회초년생에게는 ‘시작의 기술’을 추천한다. 경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행운에 속지 마라’, ‘스킨 인 더 게임’을 추천하고, 스타트업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제로투원’을 추천한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무난하게 추천을 하는 책이 바로 이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이다.


이 책 역시 추천을 받아서 읽게 된 책이다. 워낙 다수의 출처로부터 추천을 받았던 책이라 2020년에 일단 사두었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2021년 어느 봄날이었다. 그날따라 잠이 오지 않았고 딱히 정해진 일정도 없었다. 그럴 땐 책장에 꽂혀있는 책의 제목과 목차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그러다 손에 집힌 바로 이 책. 책 자체가 얇아서 가볍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이 책은 나의 인생 책 중 한 권이 되었다.




지옥과 같은 강제 수용소의 경험을 담담한 어조로 풀어내고 있다. 감정의 동요 없이, 분명 자신이 겪은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우가 자신의 캐릭터 시나리오를 관찰하듯 덤덤하게 서술한다. 하지만 소름 끼치도록 디테일한 상황에 대한 묘사에 이미 내 머릿속에서는 가장 선명한 영사기로 상영을 하기 시작한다. 아무 생각 없이 100여 페이지를 훌쩍 읽게 된다. 흡입되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이렇게 덤덤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궁금했었다. 그리고 그건 작가 자신이 특정한 형태의 마음가짐으로 수용소 생활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자신의 현실 환경과 자신의 마음을 분리시키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는 수단이 아니었을까. 방어기제 중에 억압(repression)을 작동한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 역시 억압의 방어기제가 작동한 경험이 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친구들과 쇼핑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질 나쁜 양아치들에게 걸렸다. 세상에서 가장 기분 나쁜 어깨동무를 당했다. 나와 친구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옮겨졌다. 그러던 중 나는 돈을 뺏기기 싫어서 나름의 기지를 발휘해 주머니의 지갑을 몰래 꺼내서 엉덩이 뒤로 가져갔다. 그리고 오른손 손목 스냅으로만 지갑을 어둑어둑한 곳으로 던졌다. ‘챡!’하고 지갑이 바닥에 떨어지는 그 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렸는지. 곁눈질로 지갑을 살폈고 생각보다 정확하게 그림자진 곳으로 들어갔다. 한 번에 정확해야 했던 기회를 살렸다. 속으로 기뻐했지만 절대 들켜선 안되었다. 그리고 이건 실수였다.


인근 야산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친구와 나를 취조했다. 결국은 돈이 목적이었다. 친구는 돈과 목도리를 뺏겼다. 반면 나에게는 물건도 돈도 뺏을 것이 없었다. 이상했을 것이다. 분명 쇼핑을 하고 오는 길인데 돈이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뭔가 수작을 부렸다고 그들은 판단한 것 같다. 이때 살짝의 우월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렇게 내게는 더 뺏을 것이 없게 된 나를 친구와 분리시켰다.


30여 차례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했다. 가볍게는 뺨을 때기러나 머리를 밀었다. 무겁게는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얼굴에 그대로 로우킥을 꽂았다. 희한한 건 아픈 감각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감정이 끊어져 있었던 것이다.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빨리 정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아프진 않았지만 아픈 척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이 들어 그렇게 연기했다.


그리고 가장 기분 나쁜 선택을 강요받았다.


“코가 부서질래, 광대가 부서질래, 아니면 다이 뜰래?”


1:1이면 충분히 이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지만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이가 뭔데요"라고 물었다. 못 알아듣는 척했다. 일종의 퇴행 방어기제였다. 그리고 또다시 일방적인 폭행은 이어졌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정확히 감각되지도 않는다. 충분히 즐겼는지, 힘이 빠진 건지 여기에서 1시간 동안 그대로 있어라는 얘기를 남기고 떠났다. 친구와 나는 산속에 큰 대자로 쓰러져서 서로 괜찮냐는 말만 했던 것 같다. 그날의 산속은 왜 그렇게 어둡던지. 무력한 한 마리의 동물이었다.




한 때 트라우마라고 생각했었던 나의 사건이다.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찌릿하고 아프긴 하다. 모든 감각이 끊겼던 나는 그 사람들이 얼굴도 입었던 옷도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경찰서에 갔을 때 친구의 진술과 내 진술이 달랐다.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던 것이다.


이제는 나의 경험을 남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같이 사건을 겪었던 친구들이 이 일을 꺼내려고 하면 기분이 좋지 않다고 꺼내지 말라고 했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는 괜찮다.


그때 그 사건을 일으킨 그 사람들을 나는 과연 용서할 수 있을지를 오랜 기간 생각했다. 용서를 했다가도 어느 순간 불같은 감정이 튀어 오르기를 몇 년을 반복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사건을 다르게 바라본다. 이해하려고 했었지만 이해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 사건은 자연재해였다. 인간의 영역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산사태가 나더라도 어떻게 산을 원망하겠는가. 폭풍이 몰아치더라도 어떻게 폭풍을 원망하겠는가. 자연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었다. 나는 그 자연에 휩쓸린 것이다. 자연 속 인간은 미물일 뿐이다. 자연을 원망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나는 어린 나를 애도하고 안아줄 수 있었다.




그때의 행동을 후회하냐고? 맞다, 후회한다. 하지만 후회만으로 끝나진 않았다. 그렇게 인간성이 상실되는 시기에 나는 나의 억제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순간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나의 감정이 차단되고 모든 논리회로가 작동하는 그 감각을 경험했다.


드래곤볼에 나오는 초신수를 먹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초신수는 잠재능력을 전부 끌어내주는 약이다. 잠재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 힘을 전부 활용하게 해 주지만, 이미 자기 능력이 전부 개발된 사람은 마셔도 소용이 없다. 초신수는 사실 극약으로 일부러 독을 마시고 그 독을 이겨내 몸의 힘을 끌어낸다는 것이다. 


나는 토해내지 않고 삼켰다. 그리고 각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으로 익힌 나의 고유감각은 이제 위기의 순간에서 나를 구해주는 궁극기가 되었다. 운이 좋게도 죽음의 고통을 소화했고, 이 고통의 경험은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나 자신을 제 3자로 바라보고 기계적으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 신의 권능 중 일부를 하사 받았다. 나는 자연이 선물해 준 이 경험과 능력을 어떻게든 환언해야 할 책임이 있다.




폭풍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나는 단 몇 시간의 순간만으로도 지독히 힘들었었다. 그럼에도 그 자연재해 속에서도 분명 인간이 행동하고 어떤 태도를 지닐 수 있는지 선택권은 있었다. 난 폭행을 당하고 아픈 것을 연기하기로 택한 것이었다. 분명 그 순간에도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결정가능한 나의 자유의지가 있었다. 삶이 나에게 내 인생의 의미에 대해 질문했고 나는 행동으로 답해야 했다.


사람은 인간의 존엄성 자체로 모두 고유한 가치를 가진다. 그리고 그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선택의 순간에 자유를 인지하고 스스로가 의도한 대로 행동할 책임감이다.


나의 경험이 있었기에 이 책은 나의 인생책이 되었다. 내가 강제 수용소의 생활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미약하지만 강제 수용소의 경험과 비슷한 순간의 경험을 했었다. 그리고 그 감각이 활성화될 때 나는 자유로울 수 있다.




Reference.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

드래곤볼 - 토리야마 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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