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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엄마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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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글라라 Nov 05. 2021

2021. 10. 30. 토요일

아침부터 오후까지 세션이 있는 날이다. 상담일지를 쓰면서 점심은 빵과 과일로 해결했다.

1시부터 오후 세션 시작. 채은, 은호, 수아 3명의 아이와 부모들을 연달아 만나야 한다. 채은이 놀이하고 있는데 누군가 노크를 한다. 은호가 시간을 잘못 알고 1 시간 일찍 왔다. 어쩔 수 없이 기다리도록 하고서 마음이 쓰인다. 채은이 세션에 집중하지 못하고 딴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본다. 세션 중에 마음이 딴 데 가 있다니. 치료사로서는 엄청 마이너스인 자세이다. 치료사 10년이지만 여전히 서툴고 미숙하다. 온전히 함께 한다는 것, 스승님의 가르침을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이 많아서 어떻게 아이랑 세션을 하지?" 나의 잡념의 습성에 대해 꼬집으며 질책하듯이 물었던 슈퍼비전이 떠오른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세션에 집중.

채은이와 놀이를 마치고 잠시 쉬는 시간, 수아 엄마에게 부재중 전화가 와 있다. 아이가 상담 가기 싫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묻는다. 수아는 어려서 소아 우울증을 앓았었다고 했다. 지난주 첫 세션에서 그동안 억울하고 서러웠던 얘기들을 다 쏟아내며 자기도 모르게 자꾸 눈물이 난다고 했다. 지난주에는 간절히 상담을 원했는데, 오늘은 상담가기 싫다고 하는 아이. 진짜 오기 싫은 걸까, 상담이 두려운 걸까. 어릴 적 부모 이혼을 겪은 수아는 무의식적으로 이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별이 두려운 아이. 상담을 안 하고 싶으면 가서 선생님과 이야기해 보라 하고 아이를 도닥여서 데리고 올 수 있도록 부탁드렸다. 다행히도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왔다. 모래상자에서 아이는 이별에 대한 불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얼른 떠나자" "같이 떠나자" "이제 떠나야 해" 이별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별이 슬프고 불안한 어린아이는 이별을 슬퍼하지 못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덤덤하게 앉아 있다. 누구에게나 이별은 아프다. 슬픈 이별. 김탁환 작가는 <그래서 그는 바다로 갔다>에서 '막연하게 뭉뚱그린 슬픔이 아니라 슬픔을 빛깔, 무늬, 무게, 의미 등으로 상세하게 나눠 논할 필요가 있다'라고 했다. 이 아이의 슬픔에는 어떤 빛깔, 무늬, 무게, 의미가 깃들어 있을까. 그 슬픔을 충분히 애도하고 떠나보낼 수 있을까.  

세션 일지를 적다가 갑자기 허기의 침입. 미칠 듯이 배가 고프다. 이대로 있다가는 쓰러질 것 같다. 노트북 전원을 꺼버렸다. 일단은 가야겠다. 뭐든지 먹어야겠다. 고픈 배를 달래고 나서 생각해야겠다.

보미랑 순남 시래기국밥을 먹었다. 보미가 먼저 도착해서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려주었다. 뜨거운 국물로 타오르는 배고픔을 달래고. 식은땀이 온몸을 적신다. 끼니를 걸러서는 안 되겠다. 점심을 가볍게 먹고 넘겼더니 이런 사달이 났나 보다. 이제는 버티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을 달래고 어르면서 보듬고 가야 한다. 10년 전 "이제는 몸에 안 좋은 것만 금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몸에 좋은 것을 찾아 먹어야 할 나이"라고 했던 한의사 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1년 동안 선배가 지어주는 보약을 먹고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선배에게 연락해서 보약이라도 지어야 하려나.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 위기를 느낀다.

집에 돌아와 소파에 쓰러진 채로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다. 멈출 수 없다. 경하와 동일시되는 나를 본다. 마치 내가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꿈속에는 나는 경하이다. 위경련을 겪으며 주린 배를 움켜쥐고 어둠 속에서 고향 제주를 헤매고 있는 나를 만난다. 인선을 만나고 인선의 엄마 정심을 만나고. 1998년 4.3 50주년 기념사업회 활동을 하던 때로부터 어느새 20년이 넘었다.    

소설을 읽고 책을 덮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환영들. 돌아가신 엄마와 얼굴도 모르는 큰외삼촌. 인선에게는 돌아가시기 전 엄마와 함께 제주에서 보낸 시간이 있었지만 나에게는 없다. 나는 돌아가신 후에야 엄마를 뵈러 갔다. 영정사진 앞에서 침묵의 눈물로 엄마를 그려보았을 뿐이다. 인선이 부럽기도 했다. 엄마는 떠났지만, 엄마를 기억할 수 있으니. "이제야 말햄수다" 기록이 생각난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도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엄마가 말하지 못하고 가슴에 묻은 채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마치 내 잘못인양, 엄마 이야기를 다 들어드리지 못한 나의 잘못인양 마음이 아프다. 정심의 이야기가 마치 울 엄마 같다.

작가 한강의 북 토크를 들었다. 느리게 아주 천천히 단어 하나하나를 되새기며 내뱉는 한강의 목소리가 마치 함박눈이 소복이 손바닥에 내리듯이 가슴에 쌓인다.     


눈이라는 것은 이렇게 차갑고 적대적이고

아름답고 사라지는 것

눈은 영원처럼 천천히 내리지만

결코 영원은 아니고 녹아버리고

모든 것의 사이 침묵과 소리의 사이,

삶과 죽음의 사이, 어둠과 빛의 사이,

기억과 현실의 사이, 꿈과 생명의 사이를

가득 채우면서, 이으면서,

마치 무심한 신처럼 내리고 있고.

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채우는 어떤 것처럼 내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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