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랑으로 아직 살아가는 딸의 기록
엄마,
겨울이 서운하기라도 한 듯 오늘은 공기가 유난히 차가워.
엄마를 만나러 가는 날마다 비가 오고, 눈이 오고, 이런저런 일이 겹쳐서 마치 “아직 오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는데 오늘 아침은 하늘이 맑고 투명해서 이제 와도 된다고, 조용히 허락해주는 것 같았어.
고마워.
내일모레가 크리스마스잖아.
엄마랑 보내고 싶었어.
없는 살림에도 엄마는 크리스마스만 되면 꼭 작은 선물이랑 카드를 챙겨줬지.
그 장면들이 아직도 또렷해서 엄마가 떠난 뒤에도 나는 매년 겨울이 되면 그 시간을 다시 꺼내 보게 돼.
엄마를 만나러 오는 길은 쉽지 않았어.
오늘따라 몸은 왜 이렇게 무겁고 마음은 왜 이렇게 가라앉는지.
가족끼리 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엄마 앞에 서서 울게 될 내 모습이 싫어서 발걸음을 몇 번이나 늦췄어.
봉안당에 오면 내가 혼자라는 사실이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아서.
봉은당에 오는 셔틀버스 안에서 잠깐 잠이 들었어.
어릴 때부터 차멀미가 심했는데 이상하게 버스만 타면
기름 냄새랑 인조가죽 냄새 사이에서 햇빛이 얼굴에 닿을 때 잠이 스르르 와.
엄마에게 오는 길은 늘 생각도, 걱정도, 미련도 잠시 사라져서 참 좋아.
오랜만에 만난 엄마는 여전히 맑고 단정해 보이네.
이제야 찾아온 딸이 야속할 법도 한데 꽃다발 앞에 앉아 있는 이 시간이 이상하게 편안해서 엄마도 기분이 좋은가 보다 싶었어.
엄마는
“내 죽으면 바다에 뿌려버리고 훌훌 털어라”
그랬지.
그런데 그 말만큼은 내가 들어주고 싶지 않았어.
내 고집대로 엄마를 하얀 단지에 담아 두니까 언제든지 엄마를 만나러 올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나한테는 큰 위안이 되더라.
답답하지는 않을까,
자식으로서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언젠가 내가 나이가 들어 엄마를 만나러 갈 시간이 지금보다 가까워지면 그땐 미련 없이 흩뿌려줄게.
그러니까 지금은 조금만 더 내 옆에 있어줘.
엄마를 화장하던 날,
혼자 상주를 서느라 사흘 내내 정신없이 버텼지만 대구에서 용인까지 엄마를 안고 올라오던 그 길은 잊히지가 않아.
병원에서는 임종까지 2시간 남짓 남았다고 했지.
못다 한 말 하고, 가족에게 연락하라고 했는데 나는 부를사람이 없었어.
그런 날, 엄마가 떠나는 게 얼마나 무섭고 무거웠을지 그땐 몰랐어.
의사도 놀랄 만큼 열두 시간을 더 버틴 엄마는 밤새 나랑 기대어 체온을 나누고 다음 날 해가 뜨는 아침에 떠났지.
마치 친구들이 올 수 있도록, 내가 조금이라도 덜 힘들도록 시간을 계산한 사람처럼 말이야.
차 안에서 아직 식지 않은 엄마를 안고 나는 달콤하게 잠들었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손과 발을 어루만질 수 있었던 엄마가 하루아침에 단지 안에 들어 있다는 게 도무지 실감이 안 났거든.
엄마의 사랑은 늘 그렇게 따뜻했어.
그래서인지 엄마가 떠난 지 시간이 흘러도 내 겨울은 이상하게 차갑지 않아.
엄마,
어제는 건강검진을 받았어.
새벽부터 병원에 사람들이 가득하더라.
몇십만 원이면 몸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그곳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어.
이상하지.
엄마는 평생 남의 건물 바닥을 닦고, 은행 유리창을 닦고, 비 오는 날에도 눈 오는 날에도 단 한 번도 지각하지 않았는데
정작 자기 몸은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게 말이야.
“멀쩡한데 뭐 하러 병원 가노.”
그 말이 돈을 아끼는 마음이었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알았어.
만약 그때 엄마가 한 번만 더 검진을 받았더라면,
만약 내가 엄마 손을 잡고 병원에 데려갔더라면,
지금 오늘도 엄마는 살아 있지않을까 생각했어.
아마 앞으로도 계속 생각하고 자책 하겠지…?
그런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
엄마가 남긴 건 병을 막지 못한 선택이 아니라 내가 살아갈 수 있게 만든 마음이라는 걸 말이야.
엄마는 내가 행복해지는 법은 참 많이 알려줬어.
눈 오면 깨워주던 아침,
앞산에서 눈사람 만들던 겨울,
퇴근길 붕어빵,
“괜찮다”던 말투…
어려울 때 버티는 법은 가르치지 않았지만 사실은 몸으로 다 보여줬더라.
요즘은 엄마 나이쯤 된 청소 아주머니들을 보면 마음이 쿵 내려앉아.
땀에 젖은 손, 굽은 허리, 빠른 걸음.
그 안에 엄마가 있어서 이겠지
엄마,
나 요즘 꽤 잘 살고 있어.
완벽하지는 않지만 도망치지는 않아.
슬프면 슬프다고 말하고
외로우면 외롭다고 인정하고
그래도 다시 하루를 살아.
엄마가 남긴 건
돈도, 집도 아니고 다시 일어나는 힘이었어.
“미야는 엄마 인생의 거울이다.
반짝반짝 빛나면 그걸로 됐다.”
그 말 기억해.
그래서 엄마가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이 몸이랑 이 마음 조심히 쓰면서 살아갈게.
언젠가 지금 엄마가 있는 곳에서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엄마, 내 좀 힘들긴 했는데 … 그래도 잘 살다 왔다”라고 말하고 싶거든.
엄마는 일찍 갔지만
엄마가 남긴 사랑은 여전히 여기에 있어
나는 지금도 여기서 엄마가 준 빛으로 살고 있으니까.
추운 공기 만큼 너무 보고 싶어.
그리고 정말 고마워.
엄마,
이제 갈게.
오늘은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역시 쉽지는 않네.
그래도 예전처럼 무너지지는 않아.
엄마 앞에 앉아 이렇게 말을 건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많이 단단해졌다는 걸 느껴.
여기 엄마 유골함을 앞에두고 조용히 마주하며 앉아 있으니까 엄마가 여전히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아.
괜히 허리 한 번 펴고, 숨도 고르고.
“그래, 잘 왔다”
그 말 한마디를 듣고 싶은 마음에 오늘 여기까지 왔어.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온 하루를 버티고, 사람을 사랑하고,
또 다음 날을 살아갈게.
이제는
엄마를 붙잡고 울기보다는
엄마가 남긴 걸 안고 살아걸거야.
그게 엄마를 가장 잘 보내는 방법이라는 걸
이제야 알 것 같아.
그러니까
조금만 더 저기서 편히 쉬어.
나는 여기서 잘 살다가
언젠가 다시 만나면 그땐 웃으면서 이야기할게.
“엄마, 나 잘 살았어.”
안녕, 엄마.
오늘도 고마워.
그리고 여전히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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