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원을 내고 경험한 미슐랭 스타 정식당 & 페어링의 세계
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아마도 대답은 어린 시절부터 생각해온 '세상에서 가장 큰돈', 100만 원일 것이다. 서울의 유명 호텔 뷔페도 10-20만 원 선인데, 한 끼에 100만 원짜리 음식이 있기나 할까? 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100만 원을 내고 나온 이번 미슐랭 레스토랑 방문을 통해서, 다양한 마리아주를 배웠고, 음식과 술이 가진 텍스쳐와 풍미에 온전히 집중하는 즐거움을 느꼈다. 또 새로운 경험을 함께하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음에 감사한 마음도 지니게 되었고, 결론적으로 '100만 원이 아깝지 않은! 훌륭한 시간이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맛의 경험과 새로운 깨달음의 가치가 동반될 때,
100만 원은 더 이상 큰돈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올해로 우리 부부는 결혼 2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하여 나는 지금까지 가보지 못했던, 소위 말하는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 가보고 싶다는 비전을 내보였다 (사실은 미슐랭 레스토랑이 가고 싶어서 결혼 2주년이라는 구실을 마련한 것이 맞겠다.). 사전조사에서 필수로 확인했던 항목은 바로, '와인 페어링이 되는가?'였다. 애주가로서 지론이 하나 있다면, '좋은 술과 함께 할 때 그 음식의 진가를 알 수 있다.'이다. 때문에 술이 빠진다면 제 아무리 미슐랭 스타 셰프의 음식이라 해도 그 진면목을 확인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조사 결과, 서울에 있는 미슐랭 1 스타 레스토랑의 경우 2인 기준, 와인 페어링 포함 40-60만 원 선, 2 스타 레스토랑의 경우 60-80만 원, 3 스타의 경우 80만 원 이상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 검색하기 시작할 때는 음식값이 이렇게 비쌀일인가 싶어 적잖이 놀랐다. 하지만 마치 같은 냄새를 계속 맡으면 후각이 둔해진다고 하지 않던가. 한 끼에 몇십 만원씩 하는 메뉴판을 계속해서 보다 어느새 그 가격에 적응해서 점점 더 높은 가격대의 레스토랑을 찾고 있는 내 모습에 더욱(!) 놀라게 되었다.
0. 우리 부부가 선택한 레스토랑 & 메뉴
<정식당>, Tasting menu signature course, truffle 추가, 8 glass pairing, 2인 총금액 930,000 KRW
정식당의 메뉴를 하나씩 전부 맛볼 수 있는 8가지 메뉴로 이루어진 시그니쳐 코스로 선택했고, 각 음식 자체의 맛뿐만 아니라 술과 함께했을 때 발휘하는 진가를 음미하고 싶어 각 음식별로 한 잔씩 페어링 되는 8잔 페어링 코스도 추가하였다. 미식가도 아니고, 소믈리에도 아니고, 그냥 맛있으면 맛있다! 맛없으면 맛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한 명의 손님으로 정식당의 시그니쳐 코스를 [솔직&담백&짧게] 리뷰했다.
1. 아뮤즈 부쉬 & 돔 페리뇽
'아뮤즈 부쉬'는 입을 즐겁게 하는 음식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요리사가 본인만의 개성을 살려 고객에게 대접하는 개념의 메뉴이다. 때문에 메인 메뉴 못지않게, 요리사가 가진 음식에 대한 철학을 느낄 수 있는 '첫인상 메뉴'라고 볼 수 있다. 정식당의 아뮤즈 부쉬는 재료 본연이 가진 순수하고도 숭고한 맛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요리였고, 함께 페어링 된 돔 페리뇽 (Dom perignon, Chardonnay, Pinot Noir, 2012, France) 또한 첫 식사를 기분 좋게 시작하는 축포로써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2. 캐비어 & Keep on punching
아쉽지 않게 올려진 캐비어가 등장부터 마음을 안심시켰고, 함께 페어링 된 남아공 화이트 와인 (Testalonga, Baby Bandito, Keep on punching, Chenin Blang, South Africa)의 기분 좋은 청량감이 캐비어+관자+젤리 3박자와 어울렸다. 캐비어와 함께 제공된 자개 스푼이 너무나 귀엽고 고급스러워서 인상 깊다.
3. 문어 & Lerchenberg
자극적인 입맛에 길들여진 현대인에게 딱 맞는 문어 요리였다. 문어에 가미된 파프리카는 말할 것도 없고, 곁들여진 초리조까지 재미있었다. 와인이 페어링 되면, 와인을 먼저 테이스팅 해보고, 페어링 메뉴와 같이 맛을 보았다. 이번 코스에서 페어링 된 와인 (Marc Kreydenweiss Lerchenberg Pinot Gris 2019, Pinot Grits, France)의 경우에는 단독으로 마실 때보다 문어를 입에 넣고 그 맛이 남아있을 때 마시면 와인이 가진 귀찮은 풍미가 사라지고 기분 좋은 아로마만 남았다.
4. 참치 김밥 & Cerasuolo d'Abruzzo Le Cince
정식당의 유명인사, '참치김밥'이다. 비주얼을 보고 나면 그동안 먹어왔던 참치 김밥은 무엇이고, 이것은 무엇인가. 하는 '인지 부조화' 상태에 직면하게 된다. 김부각으로 감싼 고소한 김밥 위에 생참치를 올려서 먹는다. 이것이 바로 정식당의 '참치 김밥'이다. 비주얼에 놀라고 한껏 높아진 기대와 함께 첫 입을 베어 물었는데도 불구하고 손님을 실망시키지 않는 맛에서 미슐랭 스타의 저력을 확인했다. 함께 페어링 된 영롱 보스 와인은 (Cerasuolo d'Abruzzo Le Cince, Montepulciano, Italy) 난생처음 보는 참치김밥의 비주얼에 묻히고 말았다. 와인이 알면 슬퍼할 수도 있겠지만 영롱한 자태를 담은 사진 한 장 건진 것으로 영롱 보스 와인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5. 로열 비빔밥 & Domain Louis Terral Lucie
'참치 김밥'에 놀란 후에 마주하게 되는 '비빔밥'이다. 흔히 먹어왔던 비빔밥은 명절 후에 남은 나물들을 모두 넣고 고추장, 참기름과 함께 비벼 먹는 밥인데... 암튼 이것도 비빔밥이라고 하니 그렇다 치고 먹기로 했다. 슬라이스 한 트러플을 올려 밥과 함께 비벼먹는 비빔밥인데, 다른 메뉴들에 비해 인상 깊을 만한 점은 없었다. 특히, 페어링 된 와인 (Domain Louis Terral Lucie, Gamay, 2017)도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추럴 와인의 쿰쿰한 아로마가 강렬했다.
6. 옥돔 & Macon-Vergisson & Las Cepas de Paco
한방 닭백숙의 은은한 풍미를 가진 육수에 겉바속촉으로 고급스러운 자태를 풍기는 옥돔이 담겨 나왔다. 옥돔과 함께 오렌지 와인이 페어링 되었는데 (Vinos Oceanicos, Las Cepas de Paco, El Reflejo, 2018, Palomino, Spain) 옥돔과 함께 즐겼을 때 와인에서 한방 백숙의 맛이 뿜어져 나오는 환상의 마리아주를 경험했다. 사실 이때 내추럴 와인에 질렸던 터라, 한 잔은 클래식 와인(Domaine Saumaize-Michelin Macon-Vergisson 2019, Chardonnay, France)으로 페어링을 요청하였는데, 오렌지 와인 덕분에 이를 크게 후회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정식당에서 맛보았던 코스 중에서 우리 부부에게 "진정한 마리아주"를 가르쳐 준 환상의 코스는 바로 이 '옥돔과 오렌지 와인'이다.
7. 한우++ & Cuvelier Los Andes
한우 스테이크가 나오기 전에 먹을 트러플을 고르고, 각기 다른 나무로 만들어진 나이프를 고른다. 뭔지 모르겠지만 묘하게 기분 좋은 단계였음에는 틀림없다. 한우 스테이크는 상상할 수 있는 한우의 맛이고, 함께 페어링 된 와인도 그저 적당한 바디감에 한우에 대적할만한 기본적인 소행을 다하는 적절한 와인이었다 (Cuvelier Los Andes Grand vin 2009, Malbec, Argentina). 이 와인은 우리 부부가 가장 처음으로 마셨던 와인과 같은 아르헨티나 말벡 와인이라는 점에서 슴슴한 감동을 선사했다.
8. 수정과
미안하지만, 수정과는 수정과 했다.
9. 뉴욕-서울 & Privada Moscatel de setubal
아직도 이 디저트 메뉴와 제목의 관계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고, 맛은 좋았다. 정식당에서의 마무리가 조금 더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바로 디저트와 함께 페어링 된 포트와인 덕분이다 (Privada, Moscatel de setubal 1998, Moscatel, Portugal). 할머니 장맛처럼 깊은 단맛이 20여 년 숙성의 저력을 보여주었고, 견과류로 이루어진 디저트와 최고의 궁합을 보여줬다. 포트와인도 우리 부부에게 매우 의미 깊은 와인이라 정식당에서의 마지막 코스도 훈훈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