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있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인데 기분이 좋아지는 마법!
매주 엄마네만 가다가 친정 엄마를 모시고 우리 집에 온 적이 있다.
2년 전 내 생일쯤 5월이었는데 그때 엄마도 마침 회사가 쉬어서 이틀간 우리 집에서 맛있는 것도 해주고 아이들과도 함께 있어줬다.
엄마를 모시고 우리 집에 오는 게 얼마나 좋았는지 그날은 일기에도 길게 기록 해났더라.
하지만 중요한 건 엄마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엄마가 와서 아이들이랑도 재밌게 놀아주고 아침부터 맛있는 엄마 밥도 먹고 호수공원 꽃구경은 못 갔지만 함께 산책과 나들이를 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호사를 누리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해를 쬐고 앉아있는 엄마에게
-엄마 뭐 해?
라고 물으니,
-응, 광합성 중 :)
어린 시절부터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단 한 번도 쉬거나 일을 안 한 적이 없는 사람이니 이 시간에 이렇게 대낮에 햇볕을 쬐기도 어려웠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평온하게 해를 쬐고 아무것도 안 하고 벤치에 엄마랑 앉아있는 그 시간 그대로 좋았고 감사했다.
집 근처 한적한 생태공원과 농업 공원을 산책했는데 역시나 왁자지껄, 시끌벅적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우리 아이들 덕분에 정신이 없었다.
-장모님, 힘드시죠? 아이들 때문에 정신없고 힘드시죠?
신랑의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그래, 임서방. 이제 좀 들어가자.
엥? 온 지 30분도 안 됐는데? 벌써, 푸하하. 나는 웃음이 터졌다. 늘 성실하게 일하고 집에서 조용히 쉬는 패턴으로 살아온 엄마에게 우리 아이들은 분명 정신없는 존재일 테니, 당연한 반응이다. 주일에도 찾아가면 반갑게 안아주고 환대하지만 내가 안방에라도 들어가서 그대로 뻗어 누우면 잠든 나를 흔들어 깨운다.
-얼른 좀, 가라! 가! 엄마도 이제 쉬어야지!
ㅋㅋㅋ
아니, 신랑이 잘 땐 피곤하니까 주말이라도 자야 한다며 이불을 덮어주면서 내가 자면 아이들에게 시달리는 게 힘드시니 바로 깨우러 오신다. ㅋㅋㅋ
물론, 얼마나 힘드신지 아니까 이렇게 주말마다 맛있는 밥을 차려주시는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한 마음뿐이다.
중요한 건 그날의 대화에서 우리 신랑이 반응이었다.
장모님, 많이 피곤하고 정신없으실 거예요. 저도 그래요. 주중엔 매일 야근하고 아이들을 자주 볼 수 없으니까 나경이가 아이 키우고 씻기고 재우고 있으면 그때 올 때도 많아요. 나경인 이런데 나와서도 매일 두, 세 시간씩 아이들과 나와서 맨날 놀아요.
앉아있는 것조차도 정신 사납다는 엄마에게 신랑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냥 그렇다는 말인데, 별 말이 아닌데 갑자기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찌르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흐뭇하고 뿌듯하고 그러다가 깨달았다.
대단한 칭찬을 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덧붙인 것도 아닌데
신랑은 평소에도 유머러스하고 선한 사람이지만 고마워, 미안해 이런 말은 겉치레라고 여기는 편이었다. 또 속상하다, 좋다, 나쁘다처럼 이런 기본적인 감정조차 잘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도 아이를 키우고 살면서 신랑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 유달리 감정을 전달하거나 언어에 예민한 나는 대화를 많이 시도했고 얼굴은 마주하고 말하는 게 어려울 때면 신랑은 긴 장문의 편지나 카톡으로 마음을 표현해주기도 했다. 장족의 발전! 그런데 저 날은 '인정하는 언어'라는 게 참 별 거 아니면서도 얼마큼 강한지 깨달았던 날이다.
11년 만에 신랑과 함께 살면서 '인정하는 말'을 들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대단하거나 좋은 엄마란 표현도 하나 없었지만 그냥 엄마라서 데리고 나가 논걸 신랑이 알아주고 그걸 우리 엄마한테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쏟아질 만큼 울컥했던 것 같다. 내가 늘 듣고 싶었던 '인정의 말'은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을 뛰어넘어 담백하고 고요했고 자연스러웠다.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잡으며, 붙들고 앉아서 아이스크림도 먹고 놀이터에서 시간을 흘리는 순간들이 떠올랐고 그걸 모르는 게 아니라 알고 있었고 인정해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좋았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나를 인정해 주는 말' 한 마디에 목말랐는데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고 이렇게 살아온 시간 속에서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까지도 힘들었던 것 같다. 내가 정말 듣고 싶은 말을 A4지 한가득 채워서 쓴 날들도 있었다. 그걸 쓰고 다시 읽으려고 하는데 글자 하나하나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고 웃음이 났다.
물론 열심히 훈련하고 대화를 많이 한 덕분에 신랑은 언제부턴가 고맙다는 표현을 정말 잘한다. 나는 내 편이 되는 고마운 사람들을 떠올렸고 나도 엄마에게, 신랑에게, 우리 아빠, 언니, 사랑하는 아이들, 내 친구들과 이웃, 처음 마주친 고마운 사람들에게도 더 많이 사용해 줘야겠다 생각했다.
그날 농업 공원엔 꽃과 꿀벌이 무척 많았다. 꿀벌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데 어딘가 숨었다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등장한 작은 꿀벌들의 날갯짓이 반가웠고 엄마랑도 좀 더 자주 산책하고 싶었다고 일기에 쓰여있었다.
오늘 글향님의 고양이 글을 읽으면서 졸졸 따라다니는 고양이 모습이 그림자 같다는 표현이 생각났다. 늘 내가 있는 곳 어디든 가고, 잠시 안보인 듯 하지만 곁에 있는 사랑스러운 고양이.
물론 사람이 동물을 키우지만, 우리 생각보다 반려동물이 주인을 사랑하고 챙기는 마음, 지키려는 마음은 더 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는 그대로 나를 비춰주는 그림자
인정하는 말 역시 '그림자'같다고 느껴졌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비춰주고 반영해주고 있지만 너무 가까이 있어서 우리는 그 말조차 깜빡하고 잊거나 스쳐 지나갈 때도 많다. 지금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인정하는 말을 해보자, 물론 그전에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마음이 먼저 필요하다.
*선재야, 교차 줄넘기가 안 돼도 계속해서 두 번 세 번 그 이상으로 시도하면서 하나씩 더 넘는 모습을 봤어. 엄마 같으면 포기하고 좌절했을 수도 있는데 땀 흘리면서도 너는 언제나 도전하고 있더라.
#몹시쓸모있는글쓰기
#인정
#인정해주는말
#있는그대로의나
#나를인정해주기